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를 떠올렸을 때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있을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족 간 헌신적인 사랑으로 화목한 가정의 정의를 보여주는 가족들을 만나본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만 떠올리면 함께했던 추억이 아른거려 눈물이 납니다.”

배윤자(61)씨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함께한 추억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시어머니(당시 62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무려 18년간 이어진 병간호였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 이발을 시켜드리는 등 시어머니의 손과 발이 돼줬다. 시어머니의 기저귀를 살 돈도 마련하기 어려웠던 배씨는 천 기저귀를 직접 떠 사용하기도 했다.

울릉도에서 태어난 배씨는 씩씩한 대장부 성격을 지닌 어머니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밑에서 컸다.

23세의 나이에 대구로 시집을 오게 되면서 다정하고 온화한 시어머니의 성격에 반해 더욱 따르며 지냈다.

시어머니가 쓰러지고, 장남이었던 남편의 뜻에 따라 시어머니를 모시기 시작했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재차 받는 등 배씨는 허리가 불편했지만,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거나 간병인을 두지 않았다.

배씨는 “시어머니와 함께해 든든하고 행복했다. 시어머니에게 치매 증세가 나타나고 대화가 어려웠지만, 시어머니와 감정적으로 서로 많은 것을 교감했다. 휠체어를 타고 동네 공원이라도 한 바퀴 돌 때면 그때마다 시어머니도, 나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빨갛게 익은 홍시만 보면 홍시를 좋아하셨던 시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했다.

배씨는 “홍시를 구해와 입에 넣어드리는 날이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남편 역시 어머니가 답답해할까 업어서 계곡을 찾는 등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배씨는 곁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트로트 음악을 들려드리고 춤을 추며 지루함을 달랬다.

배씨는 “아픈 어른을 모시고 멀리는 갈 수 없었지만,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계곡, 바다, 공원 등 지역 근교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고 말했다.

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돌본 공로는 2015년 4월 보화상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봉사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생긴 이후로는 꽃꽂이, 요리, 노래 등을 배워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인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대구곰두리봉사협의회에서 독거노인 도시락 제공, 발달장애인·시각장애인의 외출 돕기 및 차량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배씨는 “시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마음보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었기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베푼 것 뿐”이라며 “시어머니와 함께 한 추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배윤자(61)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18년 동안 모시며 “시어머니와 함께해 든든하고 행복했다. 시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배윤자(61)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18년 동안 모시며 “시어머니와 함께해 든든하고 행복했다. 시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배윤자(61)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18년 동안 모시며 “시어머니와 함께해 든든하고 행복했다. 시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배윤자(61)씨는 뇌출혈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18년 동안 모시며 “시어머니와 함께해 든든하고 행복했다. 시어머니와 함께한 추억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구아영 수습기자 ayoung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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