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처진소나무 향기 가득한 청정도량…원응국사비 등 보물 품은 ‘문화재의 보고<寶庫> ’ 되었네”

<7> 운문사 원응국사비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 운문사의 비구니

연두색 신록이 눈길을 사로잡는 봄날.

구름이 산사의 문에 걸려있다는 운문사 입구에 이르면, 매표소부터 시작되는 고송이 즐비한 소나무 숲길에 매료된다. 수령 100년에서 400년의 소나무 군락지가 절집까지 이어진다.

장자 ‘산목’ 편에서 말했듯이 구부정하게 자라 하늘을 찌를 듯 큰 나무이지만, 재목으로 쓸모없기에 목수들이 베어가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찍 타인의 눈에 띄어 죽임을 당하기보다 늦지만 자기방식으로 오랫동안 수명을 누리는 것도 여유로운 삶의 방식이 된다는 장자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된다.

사바세계의 쓸데없는 집착을 내려놓고 청량한 새소리로 귀를 씻으며 20여분 걷다 보면, 솔숲이 끝날 즈음에 ‘호거산운문사’(虎踞山雲門寺)라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쓴 편액이 보인다.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년(560)에 이름 모를 한 스님이 창건한 이래로 1450여 년의 역사를 잇고 있는 대가람이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다는 호거산 자락에 터를 잡고 동쪽의 운문산과 가지산이 에워싸고 서쪽의 비슬산이 감싸고 있는 대가람을 마주하면, 누구든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비구니 청정도량 운문사의 역사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때 이곳에 둥지를 튼 스님이 현재의 북대암 근처 금수동에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를 한 뒤 도를 깨달은 도반 10여 명과 함께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서쪽에 대비갑사(大悲岬寺, 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 중앙에 대작갑사(大鵲岬寺) 등 다섯 갑사를 세웠다.

이 다섯 갑사 중 중앙의 대작갑사가 현재의 운문사이다.

신라시대 대작갑사는 밀양, 창녕, 경산, 고령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 군사를 몰아내고 대가야를 병합했다.

이런 지리적 성격을 수용하여 호거산(虎踞山)의 흉맥(凶脈)에 사찰을 건립함으로써 지덕을 비보하려는 풍수지리사상(風水地理思想)이 깔려 있다.

창건 뒤 608년(진평왕 30)에 당나라 유학을 마친 원광법사가 이곳에서 신라화랑도의 기본정신이 된 세속오계를 전파하면서 1차 중창을 했다.

그러나 신라 말기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대작갑사가 파괴되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재건하기 위해 제2차 중창했다. 943년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했다.

고려시대 운문사의 최전성기는 원응국사가 주지로 있을 때였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제3차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이 되었다. 인종은 소공답(所供畓) 200결(結)과 노비 500명을 내렸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돼 1281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에 착수하였고, 운문사 동쪽에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고려시대의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됐다.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었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고,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으며,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 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일신했고,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게 됐다.

특히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됐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했다.



오늘날 한국 최대의 비구니 도량으로 17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는 백장청규(白丈淸規)를 실천하고 있다.

백장청규는 중국 당나라 선승인 백장회해(白丈懷海) 선사가 선가의 온갖 직책에서부터 식사에 이르기까지 지켜야 할 여러 규율을 담은 지침서이다.

우리가 운문사를 주목하는 것은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제193호 석등, 제208호 동호, 제316호 원응국사비, 제317호 석조여래좌상, 제381호 사천왕 석주, 제678호 동·서 삼층탑, 제835호 대웅보전, 제1613호 비로자나삼신불회도, 제1817호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와 천연기념물 제180호 처진소나무 등 10점이 있고, 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제424호 만세루, 제503호 소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자료 제342호 내원암 석조아미타불 좌상 3점 등 13점의 문화재를 지닌 ‘문화재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 원응국사비

운문사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에 3개의 비각이 보이는데 가운데 비각의 우뚝한 비가 원응 국사비이다. 이 비의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인종 때인 1145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응 국사비는 1963년 보물 제316호로 지정됐다. 비각이 무너져 1877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였고, 1963년 고쳐 지었다.

이 비는 원래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와 이수(螭首,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수호의 의미를 갖도록 한 비신(碑身)의 머릿돌)를 갖추었던 것 같지만, 현재 귀부와 이수는 없어졌고, 받침돌 위에 비신만 얹혀있고, 사각형의 화강암제 비 받침돌 위에 철 구조물로 보강된 편마암제 비신이 고정되어 있다.



비석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세 조각으로 파손한 뒤 방치한 것을 수리·복원한 것으로 보강이 시급해 보인다.

비의 규모는 높이 2.3m, 너비 0.9m이다. 비 몸체의 윗부분에 직사각형의 양각 공간에 특이하게 전서가 아닌 해서체 양각으로 위아래 1자씩 세로로 ‘원응 국사비명(圓應國師碑銘)’이라 제액(題額)하였다. 비문은 행서체로 제액 아래 세로로 음각하였다.

비석의 주인인 원응 국사(1051∼1144)는 고려 숙종 대에 활동한 고승으로 속성은 이씨이고, 속명은 학일(學一)이다.

11세에 진장 법사(眞藏法師)를 따라 출가하였고, 희함 선사(喜含禪師)에게서 공부했다. 1106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122년(예종 17) 7월 22일 왕사로 책봉됐다. 1144년(인종 22) 12월 9일 93세로 입적했다.

인종은 대사의 업적을 찬양하여 국사로 책봉하였으며, 원응이란 시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비를 세우게 명하였다.

비의 건립연대는 고려 인종의 명으로 원응국사의 사후 1년 뒤인 1145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증된다.

비문은 아호가 금강 거사이고 문하시중을 지낸 윤관(尹瓘)의 아들인 윤언이(1090∼1149)가 지었고 글씨는 신품사현 중의□ 한 사람인 대감 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69∼1158)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비문의 내용은 원응 국사가 운문사를 중창한 사실을 기록하고, 그의 유덕을 받들기 위하여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여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인도에서 27 조사를 거치고, 초조 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고 혜능의 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그 법을 이은 이가 원응 국사라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는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원응 국사의 출가와 공부, 승과에 응시하고 활동하는 과정 등의 행적과 운문사에 들어가게 된 과정, 입적, 장례, 시호를 받고 왕명으로 비를 건립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는 비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시로 이루어진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뒷면에는 국사의 문도들 성명이 해서로 새겨져 있다.

이 비의 가치는 고려 전기 불교의 종파 관계, 승과 제도, 승계, 승관 조직, 국사·왕사 제도, 사승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담고 있다. 서예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고려 전기 구양순의 해서체가 유행하는 데 반해, 안진경 풍의 비액과 왕희지 풍의 행서로 된 비문 글씨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처진소나무와 사리암



문화재를 찬찬히 살펴본 뒤 운문사의 볼거리인 천연기념물 제180호 처진소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6m 높이, 팔방으로 땅을 향해 뻗은 가지에 수령이 400년이 넘는다고 한다. 봄과 가을에 스님들이 막걸리 10여 말을 주는 보시 행사를 통해 공을 들여 돌보고 있기에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리암과 북대암 등 암자로 향하는 나그네는 주변의 숲과 냇물을 보면서 세속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기도처로 각광을 받는 사리암에는 사계절 내내 불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 외에도 운문사의 성보문화재는 비로전, 명부전 등의 전각에 717점이 있고, 주변의 내원암, 북대암, 사리암 등의 암자에 있는 433점을 합쳐 1257점의 성보문화재가 있다. 햇살 좋은 봄날 운문사를 찾아 문화재와 청정한 도량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정태수(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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