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몸비여, 이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이 상 섭

객원논설위원

전 경북도립대교수

오래전 일이다. 1970년대 초쯤으로 기억되는 서울 용산역에는 유신헌법 반대시위로 강제 징집된 학생들로 붐볐다. 그날따라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인솔헌병의 호루라기소리와 눈초리는 살벌했다.

입영열차에 타기 전 사랑하는 자식과 연인들, 형제와의 날벼락 같은 이별에 흐느끼는 환송객, 암담한 조국의 현실과 분노에 고개 숙여 울먹이던 그들 앞에 당시 K대학 K총장이 나타났다.

“사랑하는 제군여러분!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래야 눈물이 덜 난다”며 울컥하자, 학생도 환송객도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서슬이 하도 퍼레서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어둡던 시절의 아픈 기억이다.

그 시절은 그랬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의든 타의든 고개 숙임은 긍정보단 부정이 더 많다.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교양과 인품 있는 사람을 칭하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는 말도 겸손을 뜻하는 긍정의 숙임이다.

반면에 잘못을 저질러 사죄나 어려움을 애원할 땐 당연히 고개를 숙인다. 인간구실을 제대로 못 해 용서를 빌 때도 그렇다. 많이 고맙고 미안할 때도,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도, 검‧경 포토라인에 설 때도 고개를 숙인다. 이처럼 부정의 숙임이 훨씬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집만 나서면 온통 숙인 사람들뿐이다. 길을 걷는 사람도 버스와 지하철 안의 승객들도 ‘스마트폰과의 전쟁’이라도 치르는지 모두가 숙인 채 열심이다. 경로석도 점점 닮아간다. 가물에 콩 나듯 책보는 사람을 보면 마치 천연기념물처럼 보이고, 본지도 오래되었다.

이처럼 스마트폰에 혼이 나가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사람을 좀비에 빗대 스몸비(smombie)족이니 저두족(低頭族)이라는 표현은 오래전의 이야기가 됐다.

문제는 이로 인해 사망 등 대형사고의 급속한 증가다. 횡단보도와 운전 중이 가장 많고, 자전거와 오토바이, 경운기까지 ‘거리의 시한폭탄’이 된 지 이미 오래고, 나라마다 대책도 다양하다.

미국 호놀룰루(15∼130달러)와 뉴저지(85달러), 중국 상하이(200위안)는 적발 시 벌금을, 워싱턴 DC, 충칭, 앤트워프(벨기에)는 전용도로를 쾰른(독일)은 보행노면에 신호등을, 런던은 가로등을 패딩으로 감싸 다치지 않게 했다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중독자의 금단현상을 막기 위해 ‘대체형 스마트폰’에 ‘눈 안마기’까지 등장하였고, 영국과 네덜란드는 신입교원에게 ‘스마트폰 안전교육’을 강화해 학교초기교육에서 답을 찾고 있다.

휴대폰 100%에 스마트 폰 95%의 보급률 세계 1위 국가가 우리다. 문명의 이기가 어느덧 흉기로 변한 듯, 남녀노소 장소불문하고 손쉬운 검색만 하므로 ‘정신적인 삶’이 망가져가고 있다. 생각과 말, 웃음과 예의를 잃어버린 ‘4실증(四失症)’이란 중병에 걸린 지 오래다.

더 이상 스마폰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고개를 들고 사람과의 ‘눈 맞춤 대화’가 먼저고, 자가진단도 필요하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손 떨림과 불안감, 분실하면 친구를 잃은 슬픔, 하루 2시간(앱 30개)이상 사용, 급히 화장실 갈 때도 지참, 윗사람과 대화나 식사 중에도 울리면 달려간다. 이 중에서 4개 이상이면 중독이다. 편함만 추구해온 우리에게 준 소위 벌이며 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자가 예방법으로는 아날로그의 추억( 독서, 편지, 암산, 수첩메모 등)과 감성회복, 운전과 보행 중 사용도 메시지 즉답도 절대 안하기, 메신저 알림 끄기와 사용시간 정하기 등 철저한 자기노력과 스마트폰 쉼 센터(1599-0075)의 도움도 한 방법이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된다.

계속 숙이고 걸으면 처벌 외엔 방법이 없다. 이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야 한다. 그래야 삶이 보다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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