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기억을 소환하는 봄

1974년 4월3일, 유신 대통령 박정희는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한다. 그리고 4월25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학생 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1천24명의 위반자를 조사하였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180명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기소했다.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용공세력,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해 4월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과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수업·시험을 거부하거나 학내외 집회·시위 등 개별적 집단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에 대해서는 5년 이상의 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이에 앞서 그해 1월8일, 당시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다. “불행하게도 국가적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는 일부 인사들과 불순분자들은 부질없는 선동과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유포시키면서 사회혼란을 조장하며 헌정질서인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이를 전복하려 들고 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유신 정국에 학생들의 반유신 저항 운동이 확산되면서 시작된 긴급조치 정국은 1979년 12월8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 2천159일간 긴급조치 시대가 됐다.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된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1년 뒤인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선고 바로 다음날인 4월9일에 사형수 8명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형량이 확정된 지 겨우 18시간 만이었다. 가족들이 위로 차 면회를 갔을 때는 이미 형이 집행된 뒤였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씨. 전격 처형된 8명은 모두가 대구 경북 출신이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의도된 표적이었던가. TK 지역이 보수 우파의 근거지가 된 한 이유라고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유신정권에 의한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에 대하여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민청학련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하고 2009년 9월 사법부도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하여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였다. 또 2010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의 관련자와 가족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국가가 52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0년 12월16일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고 판결하고 2013년 3월21일 헌법재판소도 위헌이라 결정한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헌법기관들이 서로 자기 일이라며 앞 다퉈 역사를 뒤집은 셈이다.

모든 것이 하얀 눈 속에 덮여 있으면 세상이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그러나 그렇게 영원히 겨울이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봄이면 싹을 틔우는 라일락처럼 눈 속에서 언제까지나 묻혀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인간사이기도 하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언 땅을 녹이고 새 생명을 살려내니 그것이 시인으로서는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세상이라는 역설이다. 시인은 그래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김학의 사건, 장자연 사건, 제주 4·3사건, 세월호 사건, 사건, 사건들. 덮어도, 덮어 두어도 영원히 덮여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의 기억이다. 4월이면 눈 속에서 싹을 틔우는 라일락처럼.

올 봄 꽃샘추위가 유별나다. 환절기 감기몸살이 올 봄도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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