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과 포용, 협치의 정치

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넬슨 만델라의 생애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t)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27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1994년 남아공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끔찍한 고통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어떻게 증오심을 극복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증오는 마음을 짓누르며 전략에 방해가 된다. 지도자는 증오를 담아둘 여유가 없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묻지 마 반대와 증오, 맹목적인 적개심과 분노가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대화는 드물고, 상생을 위한 상호 양보와 타협도 찾아보기 어렵다. 보수와 진보 모두 극단적 대결과 대립, 혐오와 분노를 조직 보호와 유지를 위한 연료로 삼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 사회에는 선악 프레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편은 모든 것이 선이고 상대는 무조건 악이다. 선악 프레임은 내편의 이탈을 방지하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힘을 결집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선악 프레임에 갇힌 사람이 권력을 잡고 조직을 장악하게 되면 타인에 대한 관용이나 배려가 어렵고 융통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여야 모두가 상대를 공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피차가 선악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무수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옹호하고 감싸는 정부여당은 오만과 독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궁색한 변명은 지지층조차도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두고 벌이는 진흙탕 싸움도 가관이다. 정치란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진흙탕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연꽃이 피어나게 해야 한다. 우리 정치판은 연꽃은커녕 연밭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어떤 식물도 살 수 없게 물과 흙을 오염시키고 있다.

정치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민심’의 근거도 의심스럽다. 보수든 진보든 그들이 말하는 ‘민심’은 인터넷 댓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 정치에 실망한 양식 있는 대중들이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빠져있는 동안 정치인들은 소수의 극단적이고 편향된 생각에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느 진영이든 포퓰리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다. 좌파적 포퓰리즘이든 우파적 국가주의든 증오와 분노를 에너지원으로 하여 서로 사생결단으로 싸우게 되면 나라는 거덜 날 수밖에 없다. 이제 정말로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갈등과 대립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상생의 대 타협점을 찾으며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켜야 한다. 분열과 증오, 대립과 반목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 사회가 어느 한계점을 넘게 되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지도자는 양치기와 같다’는 금언을 기억하고 있다. 지도자는 무리의 뒤에 있으면서 가장 민첩한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나머지는 뒤에서 지휘받고 있다는 것을 내내 모른 채 따라가도록 해야 한다.”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 나오는 말이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친구를 가까이하라, 경쟁자는 더 가까이 하라. 포기도 지도력이다.”라는 그의 말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 ‘경쟁자를 더 가까이 하라, 포기도 지도력이다’라는 말은 우리 정치인들이 정말 가슴에 새겨두고 실천해야 한다. 만델라가 2013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영결식에는 91개국 정상과 10명의 전직 국가수반이 참석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는 간디처럼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던 저항운동을 이끌었고, 마르틴 루터 킹처럼 억압받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링컨처럼 분열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하나로 묶었다”라고 추모했다. 정치, 경제, 안보, 북핵 등 모든 면에서 생각과 행동이 분열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 국민은 대화와 타협, 통합과 포용, 협치의 정치를 갈망하고 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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