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육부촌장

통일신라는 대한민국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를 세우고 첫 왕을 옹립한 육부촌장들이야말로 사실 이 나라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고조선에 이어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등의 건국설화를 기록하면서 신라를 세운 내력을 육부촌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육부촌장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를 건국했다. 최초 신라의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창림사지의 삼층석탑에서 삼국유사 기행단이 해설을 듣고 있다.
▲ 육부촌장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를 건국했다. 최초 신라의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창림사지의 삼층석탑에서 삼국유사 기행단이 해설을 듣고 있다.


육부촌은 월성을 중심으로 지금의 금강산과 건천, 동해 양남면, 외동읍과 울산 경계지역 등으로 짐작된다. 전체가 현재 경주시 행정구역보다 크지 않은 듯하다.



또 육부는 신라왕조가 시작된 후 한참 뒤에 편성된 행정구역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써진 삼국유사는 그대로 육부촌으로 기록하고 있다.



▲ 신라를 세우고 왕을 추대한 육부촌장들을 기념하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 양산재가 남산의 서북쪽 자락에 있다.
▲ 신라를 세우고 왕을 추대한 육부촌장들을 기념하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 양산재가 남산의 서북쪽 자락에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육부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으로 그려져 있고, 이들이 모두 지금도 경주에 살고있는 이, 정, 손, 최, 배,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들이 처음 정착한 지역을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다. 단지 경주 이씨들은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소금강산자락 표암을 그들의 시조가 탄강한 자리로 설정하고,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삼국유사는 신라 태동을 소개하면서 육부촌장과 박혁거세를 같은 조에 기록하고 있지만, 육부촌장과 박혁거세 이야기를 나누어 육부촌과 촌장들의 이야기 현장을 먼저 찾아가 본다.



◆삼국유사의 육부촌

삼국유사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조에 신라를 세우고, 첫 번째 왕을 옹립한 사람들과 그들의 시원을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육부촌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 알천공이 처음 하늘에서 강림했다는 금강산의 광림대.
▲ 알천공이 처음 하늘에서 강림했다는 금강산의 광림대.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다.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 촌장은 알평이라 하고, 처음 표암봉에 내려와 급량부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다. 촌장은 소벌도리라 하는데 처음 형산에 내려와 사량부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 남산부라 하고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쪽 마을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다. 촌장은 구례마이며 처음 이산에 내려와 점량부 또는 모량부 손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 장복부라 하고, 박곡촌 등의 서쪽 마을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의 진지촌이다. 촌장은 지백호라 하는데, 처음 화산에 내려와 본피부 최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 통선부라 하고, 시파 등의 동남쪽 마을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바로 이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과 미탄사 남쪽에 옛터가 남아 최후(崔候)의 옛집이라 하는데,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다. 촌장은 지타라 하는데, 처음 명활산에 내려와 한기부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 가덕부라 하고,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의 동쪽 마을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다. 촌장은 호진이라 하는데, 처음 금강산에 내려와 습비부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 임천부라 하고, 물이촌, 잉구진촌, 궐곡 등의 동북쪽 마을이 이에 속한다.



윗글을 살펴보건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 노례왕 9년(32)에 비로소 여섯 부족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내려 주었다.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중흥부는 어미가 되고 장복부는 아비가 되며, 임천부는 아들이 되고 가덕부는 딸이 된다고 하나, 실속은 자세하지 않다.



◆신라 6부촌의 현재 위치

삼국유사가 6부촌의 위치를 고려 시대의 행정구역명으로 특정하고 있지만,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옛 지명과 역사적 이야기 등을 토대로 현재의 위치를 추정해본다.



▲ 알천공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장 먼저 몸을 씻었다는 광림대 석혈.
▲ 알천공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장 먼저 몸을 씻었다는 광림대 석혈.


△알천 양산촌(급량부)은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라고 했다. 이병도는 남천 이남지역, 김원룡과 이기동은 남산의 월성쪽 경사면과 남산의 서쪽 산자락이라 주장한다. 민덕식은 북천과 남천 사이로 해석한다. 양산촌의 양(楊)은 남쪽을 뜻하므로 양산촌은 남산으로 풀이된다.



현재의 위치로 남산 북쪽 산자락에서 오릉 지역을 포함 북천의 남쪽 일대일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알천공이 내려온 곳으로 표암 또는 박바위로 알려진 곳.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알천공이 내려온 곳으로 표암 또는 박바위로 알려진 곳.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돌산 고허촌(사량부)은 남산부라 하고,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남쪽 마을이라 했다. 남산부는 지금의 내남면과 울산시 두서면이고, 구량벌은 울산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회덕은 경주에서 언양으로 가는 국도 주변이다.

이병도는 남천 이북, 서천 이동, 월성 이서, 북천 이남, 서악동, 민덕식은 남산 서쪽 산자락의 탑동으로 보았다.



현재의 위치는 남산 서남쪽으로 내남면에서 울산의 경주 북쪽 경계 부근까지일 것이다.



△무산 대수촌(모량부)은 당시 장복부라 하고, 박곡촌 등의 서쪽 마을이라고 했다. 이병도는 효현동, 김원룡과 민덕식은 금척리, 이기동은 서악동 일대로 풀이했다.



현재 위치로는 경주시 서면에 모량천이 흐르고 있어, 이 강의 유역일 것으로 짐작해 서악동과 건천읍, 서면 일대까지라고 본다.

▲ 경주 이씨의 시조 알천공의 탄강지를 기념해 후손들이 표암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 경주 이씨의 시조 알천공의 탄강지를 기념해 후손들이 표암재를 건립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취산 진지촌(본피부)은 고려시대에 통선부라 하고, 시파 등의 동남쪽 마을이다. 이병도는 황룡사 남쪽 인왕동, 김원룡은 낭산 일대, 이기동은 낭산 서쪽 산자락으로 황룡사 이남으로 본다. 민덕식은 괘능리와 조양동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위치로는 황룡사지 남쪽 낭산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 가리촌(한기부)은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의 동쪽 마을이라고 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병도와 김원룡은 백률사 일대, 이기동과 민덕식은 소금강산 일대로 해석해 소금강산 일대로 같이 보았다.



현재 위치는 상서지와 하서지, 내아 등은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상서동, 하서리, 나아리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 동해와 연접한 양남면 일대로 본다.

▲ 알천 양산촌이 위치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오릉의 동남쪽에 담엄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가 묻혀있다.
▲ 알천 양산촌이 위치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오릉의 동남쪽에 담엄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가 묻혀있다.


△명활산 고야촌(습비부)은 물이촌, 잉구진촌, 궐곡 등의 동북쪽 마을이라 했다. 이병도와 김원룡, 이기동, 민덕식 모두 보문동으로 해석하고, 오영훈은 황성공원 일대로 주장한다.



현재의 위치는 습비부는 보문리 지역이고, 물이촌은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 물천리, 궐곡은 천북면 물천리 북쪽에 인접한 갈곡리를 이르는 말이므로 보문 동북쪽과 천북면 일대일 것이다.



◆흔적과 뒷이야기

학설에 따르면 6부촌의 현재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6부촌장들이 처음 내려온 곳과 활동 주 무대인 주거지의 위치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어 육부촌은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 육부 촌장의 후손들이 남산자락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리는 양산재 대덕문.
▲ 육부 촌장의 후손들이 남산자락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리는 양산재 대덕문.


경주 이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알평공은 표암봉에서 내려왔다 하고, 소금강산 서남쪽자락에 표암으로 전해지는 바위와 흔적을 역사적 현장으로 해석해 경주 이씨들이 신성시 하고 있다.



경북도는 표암 일대를 박바위 또는 밝은 바위로 해석하고, 경북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근원지로 보면서 신라 건국의 산실로 역사적인 곳으로 보고 있다.



▲ 육부 촌장들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육부전.
▲ 육부 촌장들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육부전.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는 6부촌장, 6성의 후손 경주 이씨, 정씨, 손씨, 최씨, 배씨, 설씨 후손들은 경주시 탑동 남산자락에 1970년 사당 양산재를 지어 촌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신라 제3대 유례왕(삼국사기는 유리왕)이 6부 촌장들에게 양산촌은 이씨, 고허촌은 최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야촌은 설씨 등의 성을 처음 내려 각자 시조가 되었다.



▲ 경주 배씨의 시조가 된 금산 가리촌의 촌장 지타가 처음 탄강한 명활산의 산성터가 복원 중이다.
▲ 경주 배씨의 시조가 된 금산 가리촌의 촌장 지타가 처음 탄강한 명활산의 산성터가 복원 중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6부촌시대

진한 지역에는 절대적인 통치자가 없고, 여러 부족 중에서 두드러진 6촌이 울산지역에서부터 영일지역까지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세를 키우고 있었다.



6부는 각기 진법을 겸한 도법과 검법, 의술을 바탕으로 한 독술, 악기를 무기로 쓰는 음공, 창술, 말타기를 기초로 하는 궁법 등을 특기로 독창적인 무예를 전수하고 있었다.



특히 신라 천 년 왕궁의 터 월성을 중심으로 촌장 알평은 평평한 들과 분지에서 풍부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진법과 묵직한 도법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왜구를 비롯한 적들은 알평이 지휘하는 양산촌 중심부에는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남산자락의 소벌도리 촌장은 화려한 검술을 바탕으로, 빠른 보법으로 영역을 지키는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서악지구에서 서면 모량천 일대 부족들을 다스리는 구례마는 의술에 밝았다. 경주 일대에서 가장 높은 단석산 주변에서 약초를 직접 재배도 하면서 무색무취한 독과 병기를 개발해 적들이 가까이 침범할 수 없게 했다.



황룡사 남쪽 낭산 일대에 자리를 잡은 진지촌 지백호 촌장은 병법과 예능에 탁월한 솜씨를 자랑했다. 특히 예술적인 자질이 뛰어나 거문고, 대금 등 모든 악기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소리에 공력을 실어 적을 제압하는 무예에 조예가 깊었다.



금산 가리촌의 촌장 지타는 동해에 접한 해안부락을 다스리면서 농사와 사냥은 물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연명하는 생업과 관련해 창술의 달인이었다. 그가 다루는 창술은 신기막측하여 가까이에서 보아도 그의 창끝을 가늠하지 못한다.

또 그가 던지는 창은 백장 밖의 새와 10장 깊이의 물고기 가슴까지도 정확하게 찌르는 솜씨로 누구도 그의 앞에서 함부로 무기를 들지 않았다.



명활산과 금강산을 부대로 사냥을 주업으로 했던 고야촌의 촌장 호진은 발 빠른 움직임이 필요해 승마술과 활을 다루는 기술이 특히 발달했다. 일직선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숲에서 나무들이 가린 뒤쪽의 목표물도 빠르게 살을 날려 명중시키는 흉내 낼 수 없는 궁술을 가지고 있었다.



뚜렷한 개성과 각자의 특기할 무술 실력을 가진 6부 촌장들이지만, 수시로 공격해오는 왜구와 이웃한 군사들의 침략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협력하고, 절대적인 지혜와 무술적 기량을 가진 지도자를 선발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그로부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만장일치제인 화백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6부촌장들이 합의하여 최초로 지도자로 추천된 박혁거세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혁거세는 6부 촌장들의 무술을 모두 전수하여 창림사 터에 궁궐을 세우고, 6부촌을 하나의 나라로 키웠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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