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울에 왔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낯섦을 서울에서 겪는 중이다.

유치원생 어린이와 아빠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광고화면을 봤다. 길을 건널 땐 노란선 안으로 반드시 걸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타인이나 차량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노란선 안으로만 걸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서울 지하철에 예전에는 노약자석이 있었다. 몇 년 만에 찾은 지하철에는 임산부석이 새로 마련되어 있다. 핑크색으로 좌석도 도드라지게 표시해 놓았다. 안내 방송도 정기적으로 나온다.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을 배려하라는 내용이다.

특히 초기 임산부는 겉으로 표가 나지 않을 수 있으니 그것까지 시민들이 고려해 달라는 당부다. 눈치 없이 핑크 좌석에 앉았던 나는 방송을 듣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결국 슬그머니 일어서서 곧 내릴 거 같은 자세로 입구를 향해 서 있어야 했다. 길눈도 어둡고 서울의 도로 상황도 녹록지 않아 나는 줄곧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그날은 격식 차린 모임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소 불편한 정장에 구두를 차려 신었던 탓에 나는 몹시 피곤했다. 모종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아내며 핑크 좌석에 앉아 있는데 순간 공중을 가르며 떨어지는 공익방송 아나운서 목소리, 나는 거기까지 감당할 맷집은 지니지 못했다.

기둥을 잡고 서 있자니 불편한 생각이 밀려온다. 과연 임산부는 이 자리에 앉고 싶을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굳이 상관없는 열차 동승자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 그 칸에 임산부가 좌석수보다 많이 탄다면 그땐 어떡하나.

코미디같은 장면은 또 있다. 일반석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이 옆의 노약자석은 세 자리나 나란히 비어 있었다. 실내는 조심하지 않으면 옆 사람 몸이 닿을 정도로 다소 붐볐다. 나는 빈 노약자석과 일반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무심코 번갈아 보았다.

임산부석에 앉았다가 모종의 낭패를 경험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눈화살을 쏘았던가 보다. 할머니가 ‘아구구’하며 일어서더니 노약자석으로 옮겨 앉았다. 오랜만에 찾은 내 나라에서 겪은 불화다.

한국에서 젊은이(또는 젊게 보이는)나, 건강한(또는 겉으로 표가 안 나는 몸이 아픈)사람이 노약자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뻔뻔함이나 용기를 장전해야만 한다. 붐비는 차 안의 빈 노약자석이나 의혹의 시선을 감수하고 피곤한 몸을 그곳에 내려놓은 이용자에 대한 눈총은 우리 사회의 경직성을 대변한다.

노인을 공경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것은 우리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 온 아름다운 유산이다. 법이나 규제로 한정할 일이 아니다. 노약자나 임산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하철이나 버스에 별도의 좌석이 굳이 필요할까 말이다.

미국에 살다 보면 공공 규율이나 법규는 해야 할 것에 대한 지시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고지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최소한의 규제와 광범위한 자율이 미국을 지탱한다. 법이란 가능한 모든 변수를 포함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개인의 양심이 작동하도록 하는 게 자연스럽다. 대신 금기를 어겼을 때의 책임은 한국보다 무겁다.

한국의 법규는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한다. 상황에 따른 인식과 판단은 고려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통제와 규범 속에 자라고 ‘알아서 하기’보다 ‘시키는 대로 할 것’을 교육받는다. 시키는 대로 한 일이므로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탓 돌릴 대상을 찾는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는 대개 책임지지 않으려는 풍조에서 기인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다. 미술관에 다녀온 후 보고서를 써야 하는 과제를 받고 시립미술관에 갔다. 학생 입장 무료였는데 나는 학생증을 갖고 가지 않았다. 당시 고등학생 엄마였던 나는 누가 봐도 20대 대학생으로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매표소 직원에게 ‘나는 학생’이라고 말했고 무료입장이 되는지 물었다. 직원은 어느 학교 다녀? 하고 물은 뒤 내게 학생표를 선선히 내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인생을 살다가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건 행운’이라는 덕담까지 선물로 받았다.

그날 나는 미술관 입구에서 학생이라고 공들여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학생증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설명했을 뿐이고 그는 내 말을 의심 없이 믿어주었다. 한국의 미술관이었다면, 학생증을 보여주기 전에는 절대로 무료입장을 못 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상황은 이해하지만 규칙이라서요’ 정도의 답이나 들었을 것이다. 감동은 오래갔다. 그리고 그런 비슷한 경험은 생활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믿어주는 사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양심과 자율이 거세된 사회는 불신의 토양이 된다. 한국도 이제 ‘알아서’ 할 만큼 성장했다. ‘시키는 대로’에서 탈피할 때도 되었다.

이성숙







윤정혜 기자 yu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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