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세상읽기

정인희

금오공과대학교

기획협력처장

마음을 읽어 주세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1년을 살았을 때 좋았던 것 하나는 횡단보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녹색불이 들어오기 때문에 언제 신호가 바뀌는지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횡단보도에 거의 다다를 때 녹색불이 깜빡거려도 저 신호에 꼭 길을 건너야 한다고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으니 절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오래전 일본 교토에 갔을 때다. 시내 한 구역의 같은 진행 방향 신호등이 일시에 바뀌는 것을 보고는 그 물리적 아름다움에, 그리고 심리적 효용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바로 앞의 신호가 적색불로 바뀔 때 그다음 신호도 적색불이 되고 그다음 신호도 함께 적색불이 되기 때문에 운전자 입장에서는 신호를 위반하면서 무리하게 교차로를 지나야 할 모든 동기가 사라진다.

반면, 어느 겨울 서울 시내에서 마주친 한 대로는 길이 너무 넓어서, 즉 횡단보도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중간에 한 번 쉬고 다시 길을 건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한 번 쉬어가는 그 시간이 대로 한가운데서 찬바람을 맞으며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길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고도 한참을 지나 겨우 나머지 길을 건널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미에서 자주하는 경험은 이렇다. 적색불에 걸려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면 바로 앞 신호는 녹색불인 채로 한참을 있다가, 겨우 바뀐 신호에 출발을 하면 조금 전까지 녹색이던 그 바로 앞 신호가 이제 적색불로 바뀐다. 교차로 하나 건너고 나면 다시 서고, 다시 교차로 하나 건너고는 서야 하는 식이다. 게다가 차량이 뜸하게 다니는 길이다. 서 있는 차만 몇 대 있고 교차로를 지나는 차는 없는 채 시간이 흐른다. 신호를 한 번만 위반하면 가는 길이 막힘 없이 편할 것 같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 차 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좀 낫다. 차 안은 바람도 불지 않고 에어컨을 켜면 더위도 주춤한다. 그런데 영하 기온의 찬 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채, 그리고 땡볕을 온전히 받으며 횡단보도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힘들다. 한때 모 지자체 위원회에서 신호의 길이에 대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일 것이라는 답을 받았다. 물론 절실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본 결과, 횡단보도의 녹색불이 사라진 후에도 같은 진행 방향의 차도는 한참을 녹색불인 채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은 차량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차도의 녹색 신호를 오래 두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면 과연 긴 신호가 차량의 원활한 흐름에는 도움이 되는가? 녹색에서 황색을 거쳐 적색으로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분명 그렇다는 답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면 달리 생각되기도 한다.

녹색 신호가 길다는 것은 결국 신호 간 간격이 넓다는 것이고, 이번 신호에 지나지 못하면 다음 신호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일부 차들은 신호가 바뀔 때 무리해서 교차로로 진입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 교차로로 진입하는 차들은 녹색 신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교통량이 많은 시간에는 긴 신호 동안 교차로에 꼬리를 물고 진입한 한쪽 방향 차들이 신호가 끝났음에도 교차로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밀려 있게 되면서 다른 방향 차들은 신호를 받더라도 교차로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당연히 사고 위험도 따른다.

우리나라 교통 신호 체계를 한 번쯤 재점검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리고 그때 단순히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든가 스무 대가 지나가는 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이라든가 하는 요인 외에도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 그 자체로 움직이는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빨리빨리’ 하자고 하는 일들이 오히려 빨리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우리들의 일상이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차를 타는 일이, 특히나 걷는 일이 평화로울 때 우리 삶의 여유도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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