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플루티스트 김영주



▲ 지난 5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귀국독주회 모습.
▲ 지난 5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귀국독주회 모습.
‘타고난 음악가.’

플루티스트 김영주(30)씨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

경북예고 실기 1등, 계명대학교 음악공연예술대학교 관현악과 장학생, 프랑스 시립음악원 조기졸업, 생모 국립음악원 전문 연주자 과정(DEM complet)·최고연주자 과정 졸업, MBC 교향악단 플루트 수석주자 등 그의 이력만 보면 타고난 음악가 기질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성과 뒤에는 그의 성실함과 노력이 있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플루트

그가 플루트를 시작한 건 어린시절 부모님의 권유였다. 악기를 하나쯤 다룰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처음 플루트를 배웠다.

부모님은 딸이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재능을 보인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처음으로 나간 콩쿠르에서 1위를 한 것이다.

그는 “나가는 대회마다 잇따라 수상을 하니깐 이게 내 길인가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플루트를 그만뒀다”고 했다.

하지만 운명이었을까. 그의 재능을 일찍이 눈치 챈 플루트 선생님이 다시 플루트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를 해왔다.

그는 “중학교 때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플루트를 다시 하면 안 되느냐고 졸랐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권유로 엄마가 다시 플루트를 배워보라고 하셨다. 그게 플루트를 다시 시작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됐다. 경북예고 입한 후에는 학교에서 실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대구예술영재원 플루트 수석단원으로 합격했고 대구시립교향악단 청소년 협주곡의 밤에도 대학생들을 이기고 플루티스트 중 유일하게 협연자로 선정됐다. 계명대학교 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하고 계명대학교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8년 유학, 시련 후 한 단계 더 성장

▲ 프랑스 생모 국립음악원에서 필립 레즈구르 선생님과 듀오 연주 모습.
▲ 프랑스 생모 국립음악원에서 필립 레즈구르 선생님과 듀오 연주 모습.
말그대로 탄탄대로였다. 최고의 성적으로 대학교를 마쳤고 유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마스터클래스 수업을 통해 프랑스 생모리스 시립음악원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그가 로익 풀랑 선생님이었다. 당시 그의 권유로 시험을 쳤고 대학교 졸업 전에 입학이 결정돼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입학 후 불과 4개월 만에 생모리스 시립음악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고 점수를 획득, 조기 졸업했다. 하지만 부족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프랑스에 있는 국립음악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수에 대한 정보와 레슨, 입학을 위한 일정을 일일이 알아봤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무모했을까 싶다. 정말 맨땅의 헤딩이었다”며 “당시 프랑스대학교는 홈페이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국립음악원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했다.

거절의 연속이었다. 개인정보 보호의 이유로 교수의 연락처를 알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교수 수업이 있는 날 문 앞에서 기다렸다. 두 달 동안 계속됐다.

▲ 지난해 5월15일 프랑스 아뜰리에 뉘메릭 홀에서 열린 독주회 모습.
▲ 지난해 5월15일 프랑스 아뜰리에 뉘메릭 홀에서 열린 독주회 모습.
그렇게 입학한 곳이 생모 국립음악원이었다. 전문연주자과정 입학 첫해 학년 말 시험에서 전체 학년 1등을 했다.

그렇게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유학생활에도 위기가 있었다. 전문연주자과정 졸업 시험 일주일을 앞두고 플루트가 고장이 난 것이다. 급하게 악기를 고치러 갔지만 악기상에서는 졸업 연주 전에 고쳐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고장난 악기로 졸업 시험에 임했고 결국 유급이 됐다.

첫 좌절이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플루트가 인생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며 “악기도 고쳐야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한국에 왔다”고 했다.

첫 좌절 이후 그의 인생도 달라졌다.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각종 콩쿠르 대회에 출전했다. 레오폴드 벨랑 국제콩쿠르에서 3위, 르 빠르나스 콩쿠르 1위, 에피날 콩쿠르에서 1위없는 2위 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잇따라 수상했다.

또 본인이 겪었던 유학시절 어려움을 후배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멘토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는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는데 유급으로 시간이 나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며 “후배들을 도와주면서 저 또한 한단계 더 성장했던 거 같다”고 했다.

생모 국립음악원 전문 연주자 과정과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친 후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음악에 대한 깊이 있고 체계적인 전문성을 쌓기 위해 베르사유 국립대학교에 진학해 음악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역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실기가 주를 이뤘던 국립음악원과 달리 국립대학교는 언어에 대한 깊이 없이는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2년이라는 시간 역시 저를 시험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 ‘19세기 프랑스에서의 뵘 플루트의 영향’은 우수 논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유학 생활만 약 8년. 그는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는 “이제 막 귀국독주회를 했고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앞으로 저의 연주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목관 5중주 팀을 만들 계획도 하고 있고, 후학 양성에 대한 욕심도 있다”고 했다. 이어 “열심히 공부하고 왔으니 저의 재능을 많은 사람들과 나눴으면 좋겠다. 좋은 자리에서 제 음악을 많이 들려 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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