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중략)//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시집『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 2003)

.....................................................

제목에서 박완서의 자전적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지난해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전체 149개국 중 115위로 여전히 성 평등 하위권에 머물렀다. 몇 년 전보다 겨우 몇 계단 상승했을 뿐 큰 변동은 없다. 특히 정치·경제 분야에서 성별 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규모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다. 조사에서 아이슬란드가 10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순으로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에 속했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필리핀이 9위를 기록해 10위권에 들었고 한국은 중국, 일본, 베트남에도 뒤진다. 그 뒤로는 중동국가들뿐이다.

2~30년 전이면 모를까 그동안 꾸준히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이렇게나 몹쓸 형편은 아닐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조사에는 남녀의 소득 격차가 여전히 벌어져 있고 정치 참여 비율도 세계 평균에 비해서 많이 낮다. 남아선호의식이 폐기된 지는 한참 되었고, 몇 년 전부터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앞지른 데 이어 2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남성을 추월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최근 여러 직업군에서 여성의 약진이 눈에 띄는 상황이라 머지않아 남성은 맥을 못 추는 시대가 오겠다는 씁쓸한 예감마저 들었던 터였다. 조사통계의 함정이나 왜곡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여성이 많은 직종에 폭넓게 진출한 것은 맞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높은 지위는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도 여성 대통령 탄생 이후 남녀 불평등이나 여권신장 문제는 한 방에 해결될 것이란 은근한 기대를 품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오히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렇다면 ‘그 많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시인의 장탄식도 철 지난 옛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남성 중심의 조직 서열문화가 쳐놓은 ‘유리천장’이 여성의 부상을 가로막는 첫 번째 이유다. 그다음으로 결혼이 발목을 잡고, 육아와 가사가 목덜미를 움켜쥔다. 지난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수만의 미국 여성노동자들이 광장에서 빵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 게 111년 전의 일이다. 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지만 여성의 입장에선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불만스럽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