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시집『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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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향점을 잃어버린 자의 암울하고 황폐한 내면이 바깥으로 삐죽이 드러나 있는 시다. 어제 기형도 30주기에 이 시를 다시 읽었다.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길 위에서 좌표를 잃은 지금 나아갈 바 몰라 막막하고 먹먹하다. 사랑도 꿈도 한순간에 다 사라져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어떠한 희망도 기대되지 않는 좌절, 붕괴된 감정,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무력감. 생의 탄력을 잃어버린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길 위에서 중얼거린다.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미 해는 져서 어두워졌고 기억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사랑의 상실은 필연적인 비극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도리밖에 없음을 잘 안다. 그래서 더 외롭게 처참하다. 돌아보면 무엇 하나.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임을 어쩌랴, 가볍게 살아지지 않는 것도 병이다. 무심한 희망들을 그르치며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나는 너에게, 또 다른 너에게, 무수한 너희들에게 나는 사라졌다. 체한 것을 게워내니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헛헛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다 굳는다. 그러나 잊지 못할 것들은 잊지 못하니 눈을 감아도 너희들 모습은 아른거린다.

불안전한 고뇌가 완전보다 낫다지만 그건 무책임한 탄식들이다.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희망이란 주머니는 모두 뒤집어 비웠다. 어둠만이 자욱하다. 달이 떠 있어도 내 눈엔 구름에 가려져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 그가 사라진 결핍의 자리. 새로운 위로를 찾아 미로를 헤매며 중얼거려 보지만 잃은 자의 지리멸렬함은 숨길 수 없다. 지나온 길은 지워지고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미명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부질없는 희망 또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렇다면 희망도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최선을 다한 슬픔만이 ‘무책임한 탄식’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길이다.

1989년 3월 7일 종로3가의 지금은 실버들이 즐겨 찾는 한 극장의 객석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듯한 모습으로 새벽의 청소하는 아주머니에 의해 발견된 기형도는 그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시기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평론가 김현이 그의 시를 두고 한 말처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짧고 굵게 끝내버린 것이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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