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 앉으면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 앉혔다. 열 판이면 열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중략)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 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 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 시집『돌아보면 문득』(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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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이후 바둑 잘 두는 사람을 ‘국수(國手)’라고 하였다, 그 국수 이야기에 즈음하면 조부보다 4살 아래인 1895년생 숙조부 권병욱(權秉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집안에서 자주 숙조부의 출중함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자식 대를 포함해 수 대에 걸쳐 그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그만큼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가문이란 뜻일 수도 있겠다. 10여 년 전 “일제시대 노국수(老國手)였던 권병욱 권재형 두 고수가 맞겨룬 실전 기보가 발굴됐다”는 뉴스 기사가 조선일보에 게재되어 화제가 될 만큼 권병욱은 바둑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 기보의 출전은 일본 바둑 전문지 ‘위기춘추(圍棋春秋)’ 1940년 3월호 특집에서였다.

“대국자 두 사람은 1945년 해방 이전 조선 바둑을 대표했던 국수급 강호 10여 명에 포함되는 강자들”이라고 소개했다. 숙조부 권병욱은 1930년대 조선기원 소속 유급 담임기사였으며, ‘운심각주인(雲深閣主人)’이란 필명으로 매일신보에 바둑칼럼을 연재했던 바둑 전문기자였다. 기보를 검토한 최규병 9단이 내린 대국자들의 실력은 현재 기력으로 아마 6단 수준이지만 전투 일변도의 바둑이 흥미로웠다고 평했다. 유명한 바둑 일화로 1944년 기다니 8단과의 대국이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기다니가 경성 방문 시 조선 국수들이 기다니에게 두 점을 놓고도 판판이 깨지자 관전하던 권병욱 국수가 나섰는데 다 이긴 바둑을 막판 작은 실수로 지고 말았다.

대국에서 기다니는 장고하여 시간을 혼자서 다 썼고 권 국수는 매점마다 노타임이었다. 권 국수는 그로부터 몇 달 후 지병인 중이염이 악화되어 타계했는데 세상에서는 기다니에게 지고는 화병으로 죽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 한판은 훗날 ‘시간제한’ 제도를 도입한 계기가 되었다. 신교육을 받았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독립운동 아니면 친일, 그도 아니면 농사밖에 할 게 없는 시대에 바둑을 두며 탈속의 한 방편으로 전국을 유랑했던 숙조부였다. 조선 국수의 1인자 노사초와 원산에서 내기바둑을 두어 거금을 딴 일도 있다. 궁인 아내를 맞고 미국유학을 다녀온 대단한 신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한 혈육인 따님(1927년생 권혁주)은 신학교를 나와 개척교회 등지에서 평생 독신으로 목회 활동을 하다가 몇 년 전 별세해 안타깝게도 후손은 없다. 이세돌이 이번 3·1절 특별대국에서 커제에게 진 뒤 은퇴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은퇴는 언젠가 하겠지만 패배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길 바란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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