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전술/ 김현식



평화의 고요가 아닌 정지된 적막함이었어요 고장난 나침반, 잃어버린 목표, 사라져가고 있는 정체성, 희미해진 가치, 그 심연은 허무의 나락이었어요 좀비들이 허연 대낮에도 춤을 추는 새카만 계곡이었지요 흐름이 멈춘지 오래된 썩은 웅덩이였어요 감격은 휘발되어버리고 침울한 먹구름만 무거운 눈물을 장전하고 있었어요 권력과 재물에 눈먼 자들의 끝없는 탐욕에 풀처럼 여린 영혼들이 지푸라기처럼 말라갔지요 무슨 이야기냐고요 눈 크게 뜨고 정신 좀 차리고 잘 돌아봐요 당신도 그중의 한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 계간 『리토피아』 2014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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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전술은 외교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초강수를 띄워 막다른 상황까지 몰고 가는 전술을 말한다. 과거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 때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서로 핵폭탄을 깔고 앉은 채 상대를 압박하는 상황이 있었다. 이때 버트런드 러셀은 핵무기 벼랑끝 전술을 치킨게임에 비유했다. 북한과 미국이 지난해 벽두에 보여준 ‘책상 위의 단추’니 ‘내 단추가 더 크다’느니 벼랑끝 전술의 말장난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과거엔 북한이 주로 이 전략을 써먹었으나 지금 트럼프의 미국은 한 발 더 나가 예측불허 돌발변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번 2차 북미협상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당장이라도 판을 엎어버릴 기세로 몰아쳐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보다는 서로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우리를 안도케 한다. 여러 정황상 이번 회담은 트럼프가 막판에 추가 요구를 함으로써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양측 모두 미성숙한 협상이었다. 미국의 국내 문제도 있고 처음부터 계산된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정은으로서는 속도감 있게 일 처리를 하고 싶었는데 뜻밖의 제동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판을 완전히 깨기에는 양쪽 모두에게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므로 분위기는 최대한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이번 선택은 일종의 벼랑끝 전술로 비칠 수 있다. 회담을 앞두고 그가 내뱉은 말들에서 얼마간 예감된 일이기도 했다. 김정은도 카드를 다 빼앗겨버리면 이후에는 끌려다닐 게 빤하므로 통큰 결단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트럼프로서도 말로는 안 그런 척하지만 궁지가 훤히 보인다. 과거 한차례 트럼프의 벼랑끝 전술이 통했던 전례가 있지만 더 이상은 힘들 것으로 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치광이처럼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를 때는 상대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끔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현상으로만 보면 ‘평화의 고요가 아닌 정지된 적막함이’ 흐르는 동안 지금까지의 남북, 북미 회담의 ‘감격은 휘발되어 버리고’ ‘침울한 먹구름만 무거운 눈물을 장전’한 듯 보이지만 방향과 목적지는 분명하고 어차피 정해져 있다.

사실 그동안 트럼프는 북한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어르고 엿 먹이기를 반복해왔다. 립 서비스는 아끼지 않은 편이지만 남과 북 모두에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상대에게 함부로 대했다. 이번에 띵 받혀버린 김정은은 그래도 믿을 데라고는 문 대통령뿐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도 문 대통령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그만큼 문 대통령의 역할과 비중이 높아졌다. 아무쪼록 모두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가기를 기대한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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