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그의 삶, 그의 꿈(79) 원조 새마을지도자 홍영기

홍영기는 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기 전부터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고향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새마을지도자 DNA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1970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을 선포하기 전부터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고향마을을 잘사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운은(雲隱) 홍영기(洪永基)선생은 새마을지도자 DNA를 타고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방음동을 비롯한 운문면 일대는 옛날부터 한지와 삼베, 조선 솥의 명산지로 지역민들은 살림살이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특히 조선 솥은 전국적인 명산지로 이곳 주민들이 넉넉하게 살 수 있는 부의 원천이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현대적 제품에 밀려 이들 특산품 생산의 명맥이 끊어지면서 농토가 부족했던 이 지역은 가난에 찌든 황폐한 농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고향 마을의 몰락에 마음 아파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잘사는 마을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품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쇠똥소령’의 이상향 만들기

홍영기는 1960년 군에서 소령으로 예편, 귀향하면서 바로 고향마을 이상향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그의 이같은 결심과 노력은 처음 냇가 자갈밭을 개간해 옥토를 만들어 ‘쇠똥소령’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성공은 동민들의 본보기가 됐다. 빈곤한 동네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사주고 춘궁기 양식이 떨어진 농민에게 무이자 장리 벼를 분배했다. 동민들의 신뢰를 얻은 그는 자신이 가진 새로운 마을의 청사진을 설명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폭적 협조와 동의를 얻어냈다.

그 결과 25평 규모의 현대식 농민회관을 짓고 동네 이발관, 공동 구판장, 공동 목욕탕, 공동 농기구창고, 기계화 도정공장, 양어장, 가마니 공장 등을 짓는 등 많은 결실을 거뒀다. 현금부담은 그 자신이 하고 노력은 동민들이 맡는 조건으로 1960년부터 8년간 이룩한 이같은 성과는 이 마을 농가 소득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왔다.

홍영기는 고향마을을 잘살게 하기 위해선 마을환경을 정비하고 소득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마을의 미래를 위해선 인재를 기르고 시골에서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육영사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구한말 선대의 개화 구국운동으로 1908년 설립했던 이 지역의 문명학교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대하던 이듬해에 이미 이 학교 이사들의 추천으로 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나 이를 중등학교로 만들기 위해 66년 이 학교를 재단법인에서 학교법인으로 변경하고 설립인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문교부 설립인가가 나지 않았다. 문교부의 거듭된 거부에 그는 장관 앞에서 비장한 각오로 혈서를 써가며 이를 관철했다. 지역의 어린 인재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했고 나라를 발전시킨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5·16민족상’ 수상과 새마을운동

‘쇠똥소령’이 이룬 산골 마을의 기적이 청와대에까지 알려져 1968년, ‘5·16’ 7주년에 ‘5·16민족상’을 수상하게 됐다.

이 상은 1969년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정책 명으로 지정하기 전에 시상된 것이고 그 내용이 새마을사업과 정신을 기리는 것임을 볼 때 당시 정부는 새마을운동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를 이미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공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9년 청도군은 각북면의 한 마을을 당시 처음으로 ‘새마을운동’, ‘새마을사업’ 시범부락으로 지정하고 지역의 이동단위농협 조합장들을 모아 참관시킨 후 각자 동리에서도 이를 전개하라고 당부했다.

이 마을을 참관하고 돌아가는 그의 마음에는 새마을사업이 자신이 지난 8년간 해온 ‘새마을 만들기 작업’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이미 실행된 사업에서는 다른 마을이 부러워할 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개개인의 이해득실에 얽혀 자신이 ‘농촌운동 청사진’에 담았던 사업 가운데 실현하지 못했던 어린이 놀이터, 골목길 넓히기, 담장 개량, 초가집 없애기, 교량 가설, 하천제방 공사, 농로 개발 등이 빠져있었던 것뿐이었다.

◆‘살고파마을’의 성공과 방음동 새마을동산

이날 새마을운동 참관을 계기로 그는 다시 분발해 자신의 마을을 5·16민족상 패에 새겨진 ‘살고파마을’로 개명하고 실현치 못한 청사진에 담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동민들의 동의를 받았다.

그날 이 마을은 큰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마시며 동민 잔치를 벌여 결의를 다졌다. 이후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넓이 5m의 넓은 마을 안길, 화려한 꽃동네와 같은 슬레이트 지붕 개량, 교량 건설, 전깃불 켜기 사업, 동리 도정공장건설, 견고한 하천제방, 200m의 콘크리트 복개 수로, 판에 박은 듯한 블록 담벼락, 집집마다 설치된 철대문 등 마을과 동네 환경은 천지개벽을 한 것처럼 달라졌다.

그 과정에서 벌인 도정공장 건설은 그의 부친이 운영하든 물레방앗간 정미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는 두고두고 부친에 대한 불효라는 생각으로 가슴에 새겨져 그를 괴롭혔다.

살고파마을은 성공한 새마을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고 전국에서 견학을 왔다. 1972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이 마을을 시찰했다. 홍영기(중앙 왼쪽 점퍼 차림)가 박정희 전 대통령(중앙)에게 마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살고파마을은 성공한 새마을로 전국에 이름이 퍼졌고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이 줄을 이어 견학을 왔다. 드디어 1972년 3월24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 마을을 시찰하게 됐다.

그를 만난 박 대통령은 “쇠똥소령 이야기는 서울에서도 들었다”며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철학, 사업내용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날 박 대통령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을 주변 2만 평의 하천부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당시로써는 거금인 2천500만 원의 자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선물을 했다.

이 돈으로 농토가 부족했던 이 마을은 넓은 농토를 가진 부촌이 됐다. 이같은 그의 투철한 새마을 철학과 지도자적 자질은 새마을운동의 전국화 교육을 담당했던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김준 원장과 함께 초기에 새마을운동 강사를 맡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바쳤던 운문면 새마을사업의 모든 업적은 1996년 이 지역 일대가 운문댐 준공으로 수몰되면서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말았다.

홍영기가 몸을 바쳤던 운문면의 새마을사업은 1996년 운문댐 준공으로 수몰돼 모두 물속에 잠겼다. 그는 운문면 까치산 자락에 자비로 방음동 새마을 동산을 조성했다. 2001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이 곳을 방문했다(맨 왼쪽 삽을 든 이가 홍영기).
그는 이곳의 새마을사업을 기억하기 위해 동네 서쪽 까치산 자락에 자비로 방음동새마을 동산을 조성했고 당시의 사업들을 자료와 사진으로 전시했다. 이 동산에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간 기록과 그가 심어 노목이 된 목련 ‘대통령 나무’가 남아있다. 동산이 준공된 2001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시절 이 곳을 방문했다. 지금은 비록 운문면 새마을사업은 사라졌지만, 그 사업의 정신은 널리 퍼져 온 나라에 스며 있다.

◆끝없는 고향 사랑

그가 태어난 해는 3·1 독립운동 후 4년째 되던 1923년이었고 작고한 해는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OECD 국가 중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국운 융성의 2011년이었다.

그의 일생은 국가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서 가장 잘 사는 시기까지 걸쳐 있으나 청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새마을사업에 헌신한 기간 이외에도 고향 사랑의 일은 지속했다.

교남학교 시절의 홍영기(뒷줄 왼쪽 세번 째).
그는 고향의 사립 문명학교에 입학해 자인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 교남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다음 동경흥아전문학관 문과 1년을 수료하고 만주의 영목조선소에 취업해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다.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하기 위한 방편의 취업이었으나 2년 뒤 일제가 패망하자 고향에 돌아와 건국청년단을 조직하고 해방된 조국 땅 고향에서 무언가 큰일을 하려는 생각으로 당시 친일 앞잡이 색출에 나서기도 했다.

칠곡국민학교 교사 시절. 홍영기(앞줄 왼쪽에서 첫째 의자에 앉은 이)는 당시 학생들과 두세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교사 부족으로 교육계에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이서면 칠곡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해 두세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학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칠곡 국교 재임 3년 만에 이서고등공민학교(현 이서 중고등학교 전신) 창설교사로 선임돼 이서 국교 별관 채를 임시 교사로 빌려 첫 입학생을 모집했다. 현 이서 중고교 자리의 부지를 매입해 목조교실 3간을 세우고 이 학교를 정식인가 중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해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학생들과 자진 입대했다. 공병 사관생도 시절(앞줄 세 번째)의 홍영기.
그는 나이든 학생들과 함께 자진 입대했다. 사병으로 입대한 그는 사회에서 학력과 경력 때문에 장교로 복무하게 됐고 휴전협정 막바지에 격전을 벌였던 동해안 최북단 고성지구 전투에서 지휘장교로 공을 세워 은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휴전과 함께 제대하고 귀향을 결심했지만 공병 장교로서 군 복무 중인데도 부대장의 허락을 얻어 대구-울산 간 도로의 미개통구간인 대천-용성간 도로를 준공하는 애향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새마을사업을 하던 시기에도 지역의 발전과 복지를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 운문사를 정화사업을 통해 전국적인 대사찰의 명성을 되찾게 했고 5·16민족상 부상으로 받은 100만 원으로 청도군민상을 제정했다.

운문의 숨은 비경 삼계리를 명승지로 가꾸었고 면민 축제인 문명제전을 만들어 면민들의 사기를 높였다. 지인 1인당 1만 원씩의 기부를 통해 운은장학회를 설립했다. 이같은 애향 사업이 결실을 맺었지만 호사다마라 했든가 뒤에서 비판하고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는 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 1998년 대한민국국가유공훈장, 2000년에 대통령감사장과 사학육성공로 봉황장을 받았다.

그는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정치에 꿈을 가지고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평소 농촌의 교통난을 안타까워했던 나머지 버스 여객사업에 관심을 갖고 1977년에는 삼천리 버스 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80년에는 경산버스주식회사 이사회장을 맡기도 했다. 경산 버스는 오늘날 142대의 시내·외 버스로 경산∼대구·청도·경주·울산·밀양 등을 오가면서 지역민들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젊었을 때부터 선대의 유지로 심혈을 기울였던 문명 중 고등학교는 운문댐 수몰 후 경산으로 옮겨 세워졌고 그의 사후 둘째 아들 택정씨가 운영하고 있다. 부인 이을선씨와의 사이에 장남 택권씨 등 2남을 두었다. 그의 묘소는 운문면 방음동 선영에 있다. ‘삼계리 명승고적지’, ‘내 고향 운문을 용궁에 바치고’ 등 저서가 있다.

홍종흠(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연보

·1923년 10월18일 청도군 운문면 방음동 출생

·1936년 자인공립보통학교 졸업

·1941년 대구교남학교 졸업

·1942년 동경흥아전문학관 문과1년 수료

·1945년 건국청년단조직

·1946년 청도 칠곡국민학교교사 부임

·1949년 청도 이서고등공민학교 창립교사

·1950년 육군 공병학교입교 육군소위 임관

·1953년 은성화랑무공훈장 수수

·1960년 육군 소령 전역

·1963년 방음동농업협동조합장 수임

·1966년 학교법인 문명교육재단 이사장 취임

·1966년 문명중학교설립

·1967년 문명고등학교설립

·1968년 5.16민족상 수상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 수수

·1971년 방음동 새마을지도자 수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입후보

·1980년 경산버스주식회사이사장취임

·2000년 사학육성공로 봉황장

·2011년 별세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홍석봉기자

포항지진 원인 ‘지열발전’…빠른 후속 대책을

포항지진의 원인이 인근 지열발전소 때문이라는 정부 조사결과가 20일 나왔다. 이로써 그
2019-03-20 16:59:54

대구·경북 인재 양성 프로젝트 성공을 바란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혁신 인재 3천 명을 육성하는 프로젝트 가동에 들어갔다. 지방의 인재
2019-03-18 16:54:54

축구종합센터 유치, 경북도 통 큰 지원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유치를 위한 2차 심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각 지방자치단체
2019-03-17 15:28:42

대구 응급의료 안전망 구축 속도 내야

대구시가 대구만의 맞춤형 응급의료 지역화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다소 늦은 감이 없
2019-03-14 1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