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주례사/ 조정권



호숫가 겨울나무가 서 있다/ 흰 눈의 면사포를 쓰고 있다/ 눈이 온다/ 일생 겨울숲속에서 밑 둥은 얼어있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견디고 있는 마음과/ 벌서고 있는 마음/ 진정 두 마음은 한마음임을 약속하겠는가.



- 시집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서정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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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필수가 아니라는 인식은 꽤 오래됐지만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나타난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울의 미혼 여성이 3%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놀랍다. 물론 ‘가능하면 하는 것이 좋다’ 16%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 66%까지 합하면 생각보다 그리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다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미혼 남성보다 미혼 여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최근 다른 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미혼여성이 전국적으로 45%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결혼할 의사가 있다고 답한 미혼남성의 59%와도 차이가 크다. 2015년 조사에서 결혼 의사가 있는 미혼여성은 65%, 미혼남성은 75%로 조사된 것과 비교했을 때 큰 폭으로 하락한 수치다. 우리 사회에서 미혼 남녀, 특히 미혼여성이 결혼을 꺼리는 것은 자아실현 욕구의 상승,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운 현실 등 가치관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일생 겨울숲속에서’ ‘겨울나무’로 ‘견디고’ ‘벌서는’ 것이 두렵고 버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진정 두 마음’이 ‘한마음’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뜻이리라.

지난 주말 울산에서 있었던 고향 선배의 막내딸 결혼식에 참석했다. 지금까지 결혼 의사를 별로 내비치지 않고 자기 일(공부)에만 몰두해있던 따님의 뒤늦은 결심으로 친구 오빠와 가약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형식적인 엄숙함보다는 흥미롭고 기억에 남는 예식으로 진행하고 싶은 이들이 많아서 주례 없는 결혼식은 이례적이 아니라 대세로 흘러가고 있다. 대신 양가 부모님의 덕담으로 이루어지는데 신랑·신부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대개 교훈적인 내용보다는 가족애가 담긴 진솔한 내용이다.

신랑 아버지의 덕담에 이어 김태수 시인의 말씀도 이어졌다. 전혀 ‘문학적’이지 않았다. 막내딸의 결혼에 약간의 서운한 감정도 묻어 있었으며, 혼사를 주위에 요란하게 알리지 않았다는 언급도 했다. 그리고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신랑·신부에게 ‘잘 살아라’란 말로 끝을 맺었다. 평소 김태수 형의 대인배 다운 체취도 느껴졌다. 무엇보다 전직 교장 선생님의 ‘꼰대’티를 내지 않았다. “몇 말씀 드리겠다”며 곧 끝날 것처럼 하면서 이어지는 전통적인 ‘주례사’가 아니어서 좋았다. 이 시도 짧아서 좋긴 한데 현장용으로 써먹기엔 적절치 않아 보인다.

주저리주저리 고전적인 주례사도 지겹지만 지나치게 함축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먹혀들기 어렵다. 역대 가장 짧은 주례사를 한 분이 백범 김구 선생이라고 한다.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후배의 아들 결혼식에서 ‘너를 보니 네 아비 생각이 난다. 부디 잘 살아라’ 누군가 시간을 재어보니 딱 5초 걸렸다고 한다. 원래 우리의 전통 혼례에는 주례가 없다. 우리나라에 주례가 등장한 것은 예식장 문화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주례 없는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의 ‘잘 살아라’란 당부는 가장 평범한 말인 듯해도 모든 것이 농축된 가장 솔직한 부모의 바람일 것이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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