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중략)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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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린 시절 공중목욕탕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나도 초등 1학년 때까지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에 입장했던 아련한 향수가 있다. 아버지가 목욕탕 데려가는 걸 인색해 하는 데다 어머니 손이라야 구석구석 매매 씻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등 2학년 때 같은 반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여탕에서 마주쳤다는 민망한 소문을 들은 이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여탕에 가는 일은 그만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그때서야 남탕과 여탕을 가로막은 벽의 존재를 실감했다.

당시 ‘가족탕’은 어떤 사람들이 이용할까? 남녀불문 온 가족이 오순도순 서로 등을 밀어주며 목욕하는 곳이 맞을까? 따위의 궁금함과 함께 막연한 부러움을 가졌다. 흥얼흥얼 늘어진 가락의 시조창이 들렸다. 물론 그때는 그게 시조인지 주술인지 그냥 넋두리인지 알지 못했다. ‘얼른 들어와!’ 아버지는 깊숙이 탕 속에 몸을 담군 채 나에게 손짓한다. 머리만 보이는 아버지와 나의 간격엔 수증기로 자욱했다. 나는 한쪽 발을 천천히 내밀어 보지만 이내 발을 뺀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 사내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몇 번의 힘겨운 시도 끝에 겨우 탕 속에 마련된 돌계단에 작은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버지, 뜨거워서 얼른 들어가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물건이 아버지의 그것을 압도할 때까지 아버지의 조바심과 나의 머뭇거림은 계속되었다. 물론 씨알이 굵어지고 구근이 토란만 해졌을 때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을 가진 않았다. 그 전까지 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사내답지 못했으며, 따라서 아들답지 않았다. ‘아버지, 사실 그때 너무 뜨겁고 두려웠거든요.’ ‘그리고 영식이가 차 선생님 가슴에 안겨 들어가는 걸 봤는데 그게 많이 부러웠어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물컹한 추억 속에서 다행인 것은 광활한 만주벌판 같은 아버지의 등을 최선을 다해 밀어드렸을 때 돌아서 씩 웃으시던 아버지를 본 기억이었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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