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랑- 아들에게/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때/ 우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시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의 사랑이리라. 특히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서로의 목숨을 담보할 만큼 강한 사랑의 전류가 흐른다. 그 자장의 세기는 말할 나위 없이 어머니 쪽이 훨씬 강력하다. 자식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희생에 견주면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효란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자식들 바라지에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지 못하고 온갖 시름과 풍파는 달빛으로 물들었다. 그 둘은 신이 맺어준 운명적인 관계가 틀림없다. 신이 일일이 강림하여 구원의 손길을 뻗칠 수 없어 대신 어머니를 보내셨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자식이 어엿한 성인이 되어도 그 ‘뒷모습에 대고’ 손 모으는 구원의 간절한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어머니의 눈에는 훌쩍 키만 자랐을 뿐 아직 어린아이며, 여전히 그 사이엔 신이 주재하고 계신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똥배가 불룩해졌어도 마찬가지다. 전류의 세기는 변치 않으며 사랑의 강물은 끝도 없이 흘러넘치고 또 넘친다. 가끔 ‘내 인생도 좀 생각해다오’, ‘어미를 너무 부려 먹지 마라’ 식의 투정을 하긴 해도 그 말씀은 결국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식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는 고백의 다름 아니다.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어디서 그보다 더한 생의 의미를 찾으랴.

그에 비해 아버지의 사랑은 다소 조건부이고 이성적이라 상대적으로 그 함량은 어머니에 못 미친다. 다른 사람의 아버지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내 아버지는 그랬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그런 모성애가 어디까지 치닫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영화였다. 영화는 자식을 위하는 어미의 맹목적인 사랑이 처한 딜레마를 부릅뜬 눈으로 관찰한다. 선과 악의 관념을 넘은 섬뜩한 모성의 광기는 자식에겐 어머니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며 대지이고 신이면서 태양임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엄마에게 자식은 중간에 든든한 신을 한 분 빽으로 두었기에 어떤 논리도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

그렇듯 자식으로서도 엄마와는 같은 신을 공유하였으므로 다른 이성적인 간섭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혼인을 하면 합법적으로 그 개입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될 존재가 생긴다. 개입 정도가 아니라 ‘소유권’ 분쟁이 발생할 경우 확실한 우위를 점한다. 어머니에겐 여전히 소중한 내 아들이지만, 그 아들의 아내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내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명절 지나면 고부 갈등으로 이혼율이 는다고 한다. 남편이 갈등을 방관하고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저하게 균형을 맞추는 게 상책인 듯싶지만 지나치게 치밀한 중립이 때로는 방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