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누워 / 박해수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일만(一萬)의 눈초리가 가라앉고/ 포물(抛物)의 흘러 움직이는 속에/ 뭇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마음은 시퍼렇게 흘러간다/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가 될까/ 물살이 퍼져감은/ 만상(萬象)을 안고 가듯 아물거린다/ 마음도 바다에 누워 달을 보고 달을 안고/ 목숨의 맥이 실려간다/ 나는 무심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이랴 싶다.



- 시집『바다에 누워』(심상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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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시인이 바다를 노래했다. 시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대체로 자유, 시간의 영원, 공간의 무한, 태초의 생명과 자연, 원형의 그리움, 고향, 어머니의 품 등이다. ‘바다에 누워’는 1985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래 지금껏 꾸준히 사랑받아온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더 알려져 있다. 비록 시인의 사전 동의 없이 만든 노래였지만 결과적으로 노래로 인해 박해수 시인은 뜨게 되었다. ‘바다에 누워’는 눈부신 파도가 밀려오는 푸른 바다의 정경을 신선하고 서정적인 감각으로 풀어냈다. 바다를 투시하던 시인의 혜안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달려와 해변에 이르러 하얗게 부서져 쓰러지는 파도 위에 자신을 누인다.

바다에 대한 단순한 관찰과 인식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인은 바다와 하나가 된 무아경의 세계에서 바다를 응시하며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본디 이 시는 출렁이는 바다에 몸과 마음을 다 싣고 스스로 푸른 물결이 되어 흐르는 무위의 경지를 싱그럽게 노래하고 있지만, 4년 전 1월 21일 시인의 돌연사 소식을 접한 후 시를 다시 읽으니 그의 영혼이 저 바다에 길게 누운 듯 무상과 비애의 노을이 더 짙게 다가왔다. 그의 이름 해수(海水)의 여신 사이렌이 다짜고짜 그를 덮쳐 너무나 뜻밖의 원치 않은 외로운 물새 되어 일순간 낱낱의 불꽃들을 송두리째 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주 ‘불금’ 모처럼 그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분들과 자정 넘도록 술을 마셨다. 물론 시인의 추모를 목적으로 어울린 자리는 아니었다. 박해수 시인과는 48년생 갑장이면서 늘 젊게 살고 쫀득쫀득한 심장을 가진 은퇴 공무원(대구시 행정관리국장) 최현득 수필가, 박해수 시인의 고교 후배이며 기자(매일신문, 경향신문) 출신 우호성 작가, 술 실력이 만만찮은 분들이다. 그들은 시인과의 갖가지 추억을 들추어냈으나 나는 몇 번 문학 행사에서 뵙고 밥을 같이 먹었을 뿐 특별한 인연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도시 초등학교(대구 중앙) 선후배지간이긴 하지만.

죽은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산 사람에게 삶에 대한 성찰의 한 방식임을 새삼 깨달았다. 죽은 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봐주고 훗날 그를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자신도 그 자리에 있을 산 사람으로서의 예의이기도 하다. 설령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도 국가와 민족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은 한 사후 무분별한 힐난과 왜곡은 아름답지 않다. 그의 영혼이 실려 떠내려온 부표가 또 어디에 머물지는 아무도 모른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 ‘일만의 눈초리가 가라앉’은 뒤 ‘뭇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가’ 되리라.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져서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에 이르리라.









박준우 기자 pj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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