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펑펑 오는 날/ 겨울눈 많이 오면 여름 가뭄 든다고/ 동네 주막에서 술 마시고 떠들다가/ 늙은이들 간에 쌈질이 났습니다/ 작년 홍수 때 방천 막다 다툰/ 아랫말 나주양반하고 윗말 광주양반하고/ 둘이 술 먹고 술상 엎어가며/ 애들처럼 새삼 웃통 벗고 싸우는데/ 고샅 앞길에서 온 동네 보란 듯이/ 나주양반네 수캐 거멍이하고/ 광주양반네 암캐 누렁이하고/ 그 통에 그만 홀레를 붙고 말았습니다/ 막걸리 잔 세 개에 도가지까지 깨뜨려/ 뒤꼭지 내물이에 성질 채운 주모 왈/ 오사럴 인종들이 사돈간에 먼 쌈질이여 쌈질이
- 시집『애국의 계절』(녹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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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보리 풍년 든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여름 가뭄 든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이곳 대구야 그렇다 치고 올해는 중부지방에도 1월 말까지 눈 보기가 힘들고 건조한 대기 상태가 지속할 전망이란다. 눈도 비도 오지 않아 미세먼지 대책으로 서해에서 인공강우 실험을 할 계획이란 소식도 있다. 이 시에서만큼은 눈 오는 날의 정경이 고스란한데, 남도의 겨울 농한기 주막에서 내년 농사 염려하며 말을 섞다가 쌈질이 난 모양이다. 노인네들끼리 지난 구원을 들춘 게 화근이 되어 주기가 올라오면서 울컥 분기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눈 펑펑 내리는 날 웃통까지 벗고 싸우는 모습은 둘레의 구경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가관이다. 그런 싸움이야 애당초 아주 험한 꼴로 번질 가능성은 희박하고 종래는 지리멸렬해져서 제풀에 흐지부지 수습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어야 정상이다. 재미나는 것은 그 틈을 타 양쪽 노인네의 암캐와 수캐가 동네 고샅에서 홀레를 붙고 말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서로 멱살잡이하다가도 힐끔힐끔 곁눈질해가며 자연히 주먹의 힘도 슬그머니 풀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쪽 콧구멍을 막고 코 한번 팽 푼 다음 소매를 툭툭 털며 서로 화해의 잔이 오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노인네들 소싯적 길바닥에 침깨나 찍찍 내뱉고 다녔는지 성질들이 고약하다.
아니면 혼자 사는 주모에게 낯짝 세우기가 필요했던 은근한 연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쌈질은 그칠 줄 모르고 막걸릿잔과 술독까지 깨부숴가며 한판 오지게 붙었다. 바깥의 개들은 사랑놀이로 질펀하게 붙어먹었는데, 사람 꼬락서니가 되어가지고 허접한 시비에 닭싸움이 목불인견이다. 두 양반 모두 찌질이가 되어가는 찰나. 보자보자 하니 도분이 나서 더는 못 봐주겠다며 주모가 나섰다. “오사럴 인종들이 사돈 간에 먼 쌈질이여 쌈질이” 졸지에 누렁이와 거멍이 덕에 사돈 관계가 된 두 노인네의 쌈질은 보나 마나 그것으로 땡땡 종을 쳤을 터.
지난 한 주 내내 남도 목포가 이 땅에서 가장 핫한 무대로 부상했다. 여기서 벌어진 난타전이 멈출 줄도 식을 줄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누구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저수지 물을 흐린다”고 했지만 그 덕에 모처럼 일대가 활기를 띠며 호황이다. 이 싸움은 투자냐 투기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냐 돈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수상한 건물과 음모의 문제가 아니라, 목포가 항구냐 호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국민을 잘 속여서 제 욕망을 채우느냐의 문제. 우르르 몰려가 ‘도둑들’이나 ‘범죄와의 전쟁’처럼 떼거리로 골목길을 걷는 멋진 샷으로 흥행을 몰아보겠다는. 싸가지가 좀 없어 보이는 한 여인을 상대로 쌈질하기에 딱 좋은, ‘오사럴’ 염병할 것들. 우리가 안 보는 데서는 개사돈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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