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중략)/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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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무렵 해금된 시인 백석에 대한 평론가들의 찬사는 가히 최상급이다. ‘가장 한국적인 시’(유종호)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김현) 등의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 또한 백석의 첫 시집을 한국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으로 간주한다. 문학에 신드롬 현상을 일으킨 사례도 극히 이례적인데, 그것도 독자가 아닌 문인과 평론가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니 백석이라는 존재가 낯설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시는 얼른 들으면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고 가만 입으로 되뇌어보면 그 자체의 언어적 질감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원래 이 시에는 제목이 없고 이 시를 발표할 때 편지 겉봉에 있는 주소를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남신의주’와 ‘유동’은 각각 지명일 뿐이고 ‘박시봉’은 사람 이름, ‘방’은 편지 쓸 때 흔히 붙이는 명사에 불과하다. 우리들 소싯적에도 아무개집에 세 들어 살면 주인 아무개 ‘방’이라고 흔히 쓰곤 했다. 다시 말하면 “남신의주 유동에 사는 박시봉 씨네 집”이란 뜻의 주소다. 그리고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된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시의 내용을 봐서 박시봉이라는 사람은 목수인 듯하며, 시적 화자(백석)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객지에 나와 박시봉이란 목수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며 자신의 근황과 심정을 마치 편지 쓰듯 적어내려 가고 있다.
그렇다면 제법 술술 읽혀져야 하는데 읽기가 그리 녹녹치 않다.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관서지방 방언 탓이다. 일부러 맞춤법을 어긴 듯한 표현과 생경한 조어도 보인다. 일제 강점기 아름다운 평안도 방언을 제대로 지켜냈다는 칭송에도 불구하고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 혹은 토속 시어의 마력에 무작정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백석이 사용한 방언들은 그 의미를 떠나 정겨움으로 들리는 까닭은 왜일까. 백석의 시가 오랜 단절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것은 이처럼 풍부한 우리 방언을 시어로 적절히 승화시켜 언어의 정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백석 시의 토속어와 방언들을 복원하는 것이야 말로 남북의 언어분단을 극복하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얼마 전 염무웅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의 강연에서도 남북한의 두음법칙이 서로 다르고 우리의 지나치게 엄격한 뛰어 쓰기에 비해 북에서는 웬만하면 붙여 쓴다고 그 차이를 말씀하셨다. 아무쪼록 올해는 지난 김정은 위원장의 ‘냉면’ 발언처럼 정겨운 북한 언어를 좀 더 많이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백석의 시가 술술 읽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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