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흰 셔츠 멕시코 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 시집『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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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ffair’는 직역하면 ‘연애 사건’ 혹은 ‘사랑 놀음’쯤 되겠으나, 그보다는 한 영화의 제목으로 또렷이 기억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시는 영화 스토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우연에 기댄 운명적인 사랑과 함께 특정 시대의 아픔을 격정적으로 자조하며 어루만지고 있다.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는 차차 고민해 보기로 하고, 다른 함의도 관두고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범한 일상에 일약 활기를 불어넣어줄 영화 같은 극적인 만남과 사랑을 꿈꾼다. 실제로 영화처럼 만나서 사랑하고 그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도 없진 않겠으나 대개는 환상이고 로망이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소개팅이나 맞선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세상의 모든 남녀의 만남은 그 인연과 운명의 얼개 속에 존재한다.
2010년 SBS 신년특집으로 첫 방영된 ‘짝 찾기’란 프로그램 역시 방송사의 작위적인 연출이 개입되었지만 짝을 고르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는 충분히 운명적인 ‘러브 어페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송을 보는 내내 불편하고 화가 났던 기억만 또렷하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것에서부터 닭잡기와 밤새 무릎 꿇기 등이 선택의 기준이라니 유치해서 못 봐줄 정도였다.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발광으로 비쳐졌다.
허황된 눈속임이고 저급한 동물적 서바이벌게임의 다름 아니었다. 아니 ‘동물의 왕국 짝짓기’보다 못한 걸 보았다는 찝찝한 느낌이 시종 가시지 않았다. 자업자득이겠으나 일부 남성출연자는 ‘찌질하다’란 손가락질에 큰 상처를 입었고, 탈락한 한 여성출연자는 외모지상주의의 높은 벽만 실감한 듯했다. 더러 출연의도를 의심받기도 하고 연예계 진출을 위한 노림수란 의혹도 따랐다. 그렇게 시작된 ‘짝’이 4년씩이나 가나 싶더니만 결국 한 여성 출연자의 자살사건을 계기로 종을 치고 말았다. 참 이상한 ‘러브 어페어’가 가도 너무 오래 갔다.
이후에도 아류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코를 빠트리고 지켜볼 만큼 나의 연식이 그만한 인내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연애의 맛’이란 한 종편 프로에서 첫 만남부터 프러포즈까지 몰아서 방영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이필모라는 배우인데 연예인이 출연한 가상 연애 프로그램 사상 결혼에 성공한 최초의 커플이라고 한다. 모처럼 청춘의 ‘러브 어페어’를 곁눈질하면서 희한하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마치 내가 새로 연애를 시작하듯 설렘과 연애의 맛을 느꼈다. 여성출연자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가상 연애로나마 감정을 살려낼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마 로맨틱한 연애의 깊은 맛을 별로 경험하지 못한 불우한 내 연애사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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