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 한 귀퉁이에 모여 무언가 숙의 중이었다 그날 오후 동료직원의 모친 회갑연 참석을 앞두고 부서 명의 축의 봉투를 쓰는데 ‘祝 壽宴’이라고 해야 할지 ‘祝 壽筵’으로 써야할지를 놓고 사무실 전 직원이 나서서 웅성웅성 설왕설래하는 모습이었다 잔치 ‘宴’이 맞는지 대자리 ‘筵’이 합당한지를 두꺼운 옥편까지 뒤져가며 벌이는 저 치밀하고도 치열한 장시간의 난상토론이라니 (중략) 문학행사 정산서류를 들고 시청을 방문했을 때다 증빙을 첨부한 금액에 ‘일금일천이백만원’이라 붙여 쓰지 않고 ‘일금 일천이백만원’ 금과 일 사이에 스페이스 바를 눌러 공백이 한 칸 생겼다고 다시 해오라며 서류를 휘릭 날리는 것이 아닌가 요즘엔 은행에서도 그러지 않는다며 비굴한 웃음으로 사정해도 금과 일 사이에 억이 들어갈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닌데 뭘 그러시냐고 따져도 소용없었다 나보다 여닐곱은 아래로 보이는 그 담당자가 붉은 사인펜으로 서류에다 가위표를 그려 넣을 때 난 21세기가 아닌 16세기나 17세기 어느 분위기 살벌한 감영 뜰 앞에서 핫바지 내리고 곤장을 맞는 기분이었다.

- 시집 『낙타는 뛰지 않는다』 (학이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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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잖은 일로 근무시간에 그러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는 것은 ‘주인 있는’ 직장에서 빡세게 일하는 회사원의 입장에서는 열불 나는 노릇이었다. 이게 다 쓸데없이 숫자만 많은 공무원들의 남아도는 할랑한 시간과 무사안일 탓이려니 생각했다. 실은 첫 직장인 국책은행의 분위기도 민간기업에 비해선 그래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으나, 바쁠 때는 엄청 바빴다. 10ㆍ26 이전까지 청와대에선 관계부처 공무원과 KDI, BOK 등 유관기관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매월 ‘월례 경제동향 보고회’가 열렸다. 우리는 그 행사를 줄여서 ‘월경’이라고 불렀다. 당시에도 경제기획원(EPB)과 재무부(MOF) 관료들의 프라이드와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조롱도 들을 때이지만 프라이드만큼은 그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당시 생산된 통계자료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재무부 한 사무관의 아집에 가까운 프라이드를 겪은 바 있다. 판단 착오와 오류가 객관적으로 증명되었음에도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 신재민 사무관을 보면서도 그때 일이 떠올라 연민이 느껴졌다. 사실 그쪽 공무원들 가운데는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 과거 김용환 재무부장관의 과장 시절 박통이 모르는 게 있으면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많은 공무원들의 습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공복도 있고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멀었다.
직급과 무관하고 근무처가 어디인가도 개의치 않는다. 김태우 전 청와대 직원의 부적절한 처신이나 예천군의회 의원들의 해외 일탈 행위도 공직자의 못된 습성에서 기인한다. ‘일금 일천이백만원’으로 기재했다고 해서 서류를 날리는 오만방자함도 전형적인 공무원 갑질이다. 율곡과 다산이 그토록 몸가짐에 대해 당부했건만 부당한 업무 처리와 인격 모독 등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어디 공무원뿐일까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히 청산해야 할 고질적인 생활적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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