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재정치부장


대구의 봉이 김선달에 대한 얘기다. 대동강 물을 멋지게 팔아먹은 김선달과 흡사한 전력을 지닌 지역의 한 유통업자의 인생은 힘든 지역 자영업자들에게 한 줌의 숨구멍을 터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봉이(?) 인생은 사회에 뛰어든 지난 1992년부터 시작됐다. 무일푼에 20대 초반이던 그는 불과 몇만 원의 적은 돈을 갖고 대구백화점 매입팀장을 찾아 사업 구상을 전하며 2평 남짓한 공간에서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그것도 사정사정해서 5월 5일 어린이날을 전후한 며칠 간의 임대가 조건이었다. 그의 유통 품목은 남생이. 자라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물 거북이다. 웬만해선 잘 죽지 않은 장수 파충류의 일종이다.
그는 당시 방생용으로 흔했던 남생이를 대구 인근에서 잡아다 대백 매장에 두고 팔았다. 어린이날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남생이를 검은 봉지에 담아 애완용으로 키워보라며 권한 것이 이날 종일 줄을 잇게 하는 대히트를 친 것.
그러자 대백 매입팀장은 임대 매장을 며칠에서 몇 달로 연장해 주는 배려를 보였고 덕분에 남생이 판매는 톡톡히 특수를 누렸다.
또 그는 지역의 남생이를 찾으러 다니다 우연히 자라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주변에 늘려 있는 짱돌과 모래를 퍼다가 남생이와 함께 통에 담아다 팔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서 두배가 넘는 수입원을 창출했다.
누구나 주울 수 있는 짱돌과 한 줌의 모래를 각각 1천 원과 1천500원에 판다는 것은 가히 봉이 김선달 수준이었다. 남생이와 짱돌, 한 줌의 모래를 통 안에 한꺼번에 판 품목의 원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노조의 시위가 심했던 당시, 매장 계단 한쪽에 쌓아둔 짱돌을 본 대백 구본흥 회장은 노조원들의 위험한 무기가 매장에 있다고 놀라 소리쳤지만 이내 설명을 듣고 무르팍을 쳤다는 일화가 아직 전해지고 있다.
혼자만의 특수를 일정 부분 누렸던 그는 주변의 ‘따라 하기 장사’에 막혀 또 다른 사업 구상을 하게 됐고 이 또한 우연한 계기로 이뤄졌다.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에 놀러 갔다가 눈에 띈 항아리 생산자와 얘기를 나누다, “생산은 무한대지만 판로가 여의치 않다”는 얘기에 그는 항아리 판매 쪽에 눈을 돌렸다.
백화점업계의 유통 방식을 이미 체감한 데다 남생이 판매와 달리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당당한 유통업의 시작이라는 데 자부심도 가졌다. 백화점 매장을 오가면서 식품 매장에 항아리가 없음을 간파한 그는 이내 된장 항아리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수입 항아리와 이천 등에서 생산한 전통 항아리의 가격 차가 얼마 나지 않는 데 착안, 이번엔 대백이 아닌 신세계백화점 매입부장을 찾아갔다. 설득 끝에 매장을 얻은 전통 항아리 장사는 곧바로 신세계의 전 매장으로 퍼졌다. 항아리 생산업자는 공장을 지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고 그 또한 전국적 판매망을 가진 어엿한 강소 유통업자로 거듭났다.
그의 독특한 아이디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된장 항아리 판매업에서 이제는 전국적 전통 도자기 작가들에게 눈을 돌리며 그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전통 도자기 유통업자로 변신했다. 그의 도자기 판매처는 대구복합환승센터 신세계 매장은 물론 전국 신세계백화점 매장으로 확대됐고 최근에는 롯데몰과 롯데백화점으로 늘려가고 있다.
최근 실물경기가 악화하면서 고전이 예상되지만 그는 늘 무한 긍정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쉴 틈 없이 움직이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그는 IMF 시절에도 이런 신조 하나로 버텼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중학교 중퇴임을 애써 강조하지도 않았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 온 사업마다 실패는 없었다. 배운 것은 없지만 쉴새 없이 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6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온다는 황금돼지해의 문이 활짝 열렸다. 경제는 더 어려워진다고 아우성이다. 어려워질수록 쉼 없이 일하면 된다는 대구의 봉이 김선달. 그의 이름은 박정열 사장이다. 이름 그대로 열정 가득한 그의 인생살이가 대구경제를 창조와 성실로 쉼 없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

이창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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