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일들이 이뤄지는 이런 기적은죽을 힘을 다해야 오는 것이다

2019 기해년 새 달력을 펴고 한 해를 새로 시작한다. 해마다 맞는 새해건만 이럴 때만큼은 늘 새로 학교에 들어가는 신입생처럼 설렌다. 어제의 그 해이건만 새해라고 스스로 감격하면서 해마다 지치지도 않고 새로 결심하는 나는 순진한가, 멍청한가, 혹은 어리석은가.
지난해 일기장 첫 페이지를 다시 본다. 결심이 면도칼에 베인 손끝의 피처럼 선명하다. 이렇게 해마다 새로 결심을 했다. 그래도 결심하지 않은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나만 그런가. 동네 앞산에도, 서울 남산에도, 동해안에도, 전국 곳곳에서 국민들은 새해를 맞아 소원을 빌었다. 많은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며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온갖 소원들을 모두 들어 녹이려니 해가 쩔쩔 끓지 않고서야 감당할 수 없는 소망들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래층 김 선생 부부는 오늘 아침에도 새벽 기도를 다녀왔다. 벌써 다섯 달째 새벽마다 기도를 다녀오고 있다고 했다. 출가한 딸이 늦게 아기를 가졌는데, 그 딸이 출산하는 날까지 기도를 다녀오기로 부부가 약속하고는 지금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언제나 얼굴에 온기와 여유가 넘쳐나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이구나.
일요일, 인근 산을 찾았다가 산행객 중 기도객들이 많이 있음을 보았다. 그들 중 자신의 몸 하나 겨우 지탱하는 꼬부라진 할머니가 등에 봇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숭고한 신앙이었다. 자신의 복을 빌려고 그 힘든 산을 오르시진 않았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오체투지로 성지 순례 하는 티베트인들의 진지함을 본 것이다. 어찌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어쩌면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함을 갖고 산을 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또는 성황당 나무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도로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는 것일 터다.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춘향이 옥에 갇혀 있을 때다. 서울 간 이 도령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어사가 되어 남원골로 온다. 그 형색이 거지 중에도 상거지 꼬락서니로 춘향의 집을 찾는다. 그때 이 도령은 장독간에 정화수 떠 놓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춘향의 모 월매를 발견한다. 월매가 바라는 것은 단지 이 도령의 성공이다. “천지신은 감동하사 한양성 이몽룡을 청운에 높이 올려 내 딸 춘향 살려주사이다.” 춘향 모의 정성에 감동한 이 도령은 이렇게 독백한다. “내가 벼슬한 것이 선영 음덕으로 알았더니, 우리 장모 덕이었구나.”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렇게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그런 다음에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거다. 이츠키 히로유키도 타력에서 그렇게 말했다. “내 할 일을 끝까지 다 하는 거다. 최선을. 힘이 다할 때까지, 하는 데까지 다 해보고, 그래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물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거다. 세상 모든 일이 원한다고, 기도한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다.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포기하기까지 과연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보는 거다.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그 때 그래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안 되는 것이다.
때로는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런 기적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설명할 수 없는 큰 힘이 나를 도와주고 받쳐주는 것이다. 그것이 타력이라고 이츠키씨는 말한다. 그런데 그런 기적이, 그런 타력은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최선을 다하고, 죽을힘을 다하고 난 다음에야 온다는 것이다.
새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돼지처럼 살지 않도록 돼지의 복을 주십시오.

이경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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