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국민이 국가 권력을 소유함과 동시에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함을 의미한다. 민주는 국민주권, 주권재민이다. ‘민주(民主)’를 ‘국民이 나라의 主인’이라는 세속적인 말로 풀어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은 단순하나 현실 정치에서 이를 제대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주권자가 한사람인 경우는 비교적 간단하다. 주권자 혼자 결정하면 된다. 그러나 주권자가 다수로 되면 민주주의 실현은 만만찮다. 주권자들의 의견이 같지 않고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다면 광장에 모여 토론하고 의논하여 합의를 도출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국가처럼 인구가 수천만에서 수십억에 이르면 민주주의 실현은 매우 어렵다. 국민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도 없을뿐더러 국민이 각각 자기 의견을 표현하기조차 기술적으로 힘들다. 5천만 명이 각각 1분씩 의견을 말하면 청취하는 데만 약 95년이 걸린다. 인터넷으로 동시 청취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파악하고 정리하여 ‘합리적 선택’을 이끌어낸다는 일은 쉽지 않다. AI의 발달로 장래 가능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의사결정을 그렇게 처리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절차적 정당성도 따져볼 문제다.
직접민주주의의 난점을 해결하고자 대안으로 채택된 것이 간접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다. 통치자나 대표자를 선출하여 그에게 일정한 권리를 포괄적으로 위임하는 것이다. 물론 주권자로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까지 위임하는 것은 아니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차선책은 되는 셈이다.
대의민주주의가 만사형통은 아니다. 통치자나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대표자들이 모여 의견을 취합할 경우, 모두 합의로 처리할 수는 없다. 토론하고 설득하더라도 끝까지 대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그럴 경우 대의민주주의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안된 방법이 다수결원리다. 다수결은 완벽하진 않지만 최후의 보루 정도는 된다. 흔히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전가의 보도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다수결은 궁여지책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여야 한다. 토론과 설득을 통해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정수다. 다수결은 원칙적 방법으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경우에 차선책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토론이나 의논도 없이 바로 표결에 부치는 방법은 진정한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실현 도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토론과 합의라는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후조건도 수용되어져야 한다. 소수자의 존중이 그것이다. 합의가 되지 않아 비록 표결에 의하여 다수결로 처리되었다 하더라도, 소수자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지 않아야 비로소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소수자도 엄연한 주권자인 사실을 다수자는 항상 유념해야 한다. 다른 사안에서 다수자가 언제든지 소수자로 그 처지가 뒤바뀔 수 있다. 다수자가 소수자를 존중해주는 정신이 살아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다.
선거에서 승리하였다고 국가가 승리자들만의 전리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선택이 채택되지 않은 국민도 주인으로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 것이다. 선출된 통치자나 대표자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의 위임도 동시에 받은 것이다. 그 누구를 찍었든지, 그 어떤 의견을 표했든지,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국가는 직접, 비밀, 평등, 보통선거를 철저히 보장한다. 투표결과로 인해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는 신념을 담보해줌으로써 주권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4대 선거원칙이 형식적으로 지켜진다고 민주주의가 잘 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실질적인 정신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지역별 개표상황에 따라 그 지역에 사는 국민을 차별하는 행태는 비밀선거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는 민주주의 이념을 유린하는 폭거다. 특정 지역 출향 인사까지 뭉뚱그려 한통속으로 차별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민주주의에 대한 패악질이다. 지지율이 저조한 지역을 통째로 차별하는 상황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각 개인의 투표 내용도 모르면서 어떻게 개별적 차별이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끝까지 미련을 버릴 수 없는 주인의 입장에서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심정으로 그 불가사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감히 묻는다. 이제 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하는 비장한 각오로 그 그릇됨을 감히 책한다.

오철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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