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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CCTV가 있으면 뭐하냐며 그는 불만을 터뜨렸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 할 수 있나. 사법농단이라고 떠들어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이해가 되더라고도 했다.
프로그래머인 그는 지난 2012년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기관이 발주한 프로젝트 공모에서 1억 원을 지원받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계약 당시 지원 조건은 주관사인 모 대학 부설 기관으로부터 합격 인증을 받는 것이었다. 1년의 연구 작업으로 프로그램 개발을 완성하고 2013년 8월 합격 인증까지 받았다. 그런데 2년이나 지나 뒤늦게 지원기관으로부터 계약불이행으로 소송당했다.
그는 괘씸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발주처의 생트집을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1억 원짜리 프로그램을 하면서 인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탓일 지도 모른다. 그는 계약서를 찾아 계약 조건을 완수했으니 지원금 회수 요구가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대전지법에서 열린 1심은 그의 손을 들어 줬다.
그런데 지원기관이 항소한 것이다. 문제는 항소심에서 발생했다. 그는 1심 판결문과 계약서 등 서류를 재판부에 들이밀며 맞섰다. 처음에는 자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던 항소심 재판장은 서너 차례 재판이 진행되면서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는 아예 듣지도 않더라는 거다. 재판 진행 중 상대측 변호사와 눈웃음을 주고받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이 제시한 증거를 찢어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결국은 정부 기관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패소 판결을 해버린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진 그는 그때서야 변호사 없이 재판을 진행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서울의 대형 로펌을 찾아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기까지 꼬박 3년이라는 세월을 업무는 팽개치고 재판에 매달린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이래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 박병대ㆍ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 두 명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사법농단 의혹으로 법관 징계위에 넘겨진 판사 13명 중 5명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판사 재임 시 페이스북에 대통령을 풍자하는 글을 써 물의를 빚었던 서기호 전 의원은 최근 법원행정처가 자신의 재임용 탈락 불복 소송에 개입한 정황을 확인했다며 재심을 주장하기도 했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가기관의 최후 보루가 사법부여야 한다. 그 중심에 대법원이 있고 대법관이 있다. 법관 인사의 꽃이라는 고등법원 부장의 승진과 대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 윗선의 감시역이 법원행정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 결과다. 말 잘 듣는 판사로 법원을 구성하고 그렇게 법원 조직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 사법농단의 실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증거가 명백한 사건에서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낸 항소심 재판장도 그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요즘 사법농단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당시 재판이 생각난다고 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재판장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고, 뭐라고 변명 하는지 듣고 싶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부 기관을 상대로 한 재판, 국내 굴지의 로펌 변호사를 낀 정부 기관이 패소하자 항소까지 했는데 재판부로서 일개 민간인쯤은 무시해도 좋을 하찮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재판부는 법정에 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 석궁을 들고 판사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퇴근하는 판사를 향해 화살을 날린 사람도 있었다. 출근길 대법원장이 탄 승용차에 화염병을 던진 민원 당사자도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났을까. 왜 패소했는지, 당신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 그걸 납득시키지 못하는 재판부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사법농단,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경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