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 내 카페언제 찾아와도 익숙함이 있는 곳네댓 둘러앉아 나라 걱정하기도

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 내 좀 한적한 곳에 카페 지베르니가 있다. 도시의 분주함을 뒤로 한 프랑스 파리 근교의 작은 시골 마을, 꽃이 가득한 모네의 정원이 있는 마을 지베르니. 그 소박함을 옮겨 놓은 곳이 카페 지베르니다. 지베르니는 카페라기보다 이웃집 거실 같은 공간이다.
눈에 띄는 빈 의자에 손가방을 툭 던져 놓는 것으로 영역을 표시한 나는 그곳에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난다. 한인타운에서 일을 자주 봐야 하는 나는 지베르니를 곧잘 사무실처럼 이용한다. 차 한 잔을 주문하고 무한히 앉아 있어도 좋다. 주인장은 아마도 내가 자주 만나는 손님을 꿰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사적인 호기심을 가져 주지 않으니 그의 인물됨을 알만하다. 오랜만에 찾아가면 주인장은 그동안 잘 지냈는지 가벼운 안부를 물어준다. 사람을 아는 체하여 주면서도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으니 그 마음 씀의 경계가 고맙다. 그는 돈키호테의 로시난테처럼 충직해 보이고 사대부가의 장자처럼 신중해 보인다. 그는 내 찻잔이 언제쯤 비어버릴지 염려하며 물병을 들고 집사처럼 간헐적으로 다녀가기도 한다. 계산대 뒤로 나 있는 주방에서 손님이 주문한 샌드위치를 만들 때 그는 소녀를 등에 업은 소년처럼 발랄해지기도 한다. 크지 않은 카페 지베르니 안에서 그는 숙련된 연기자같이 장소에 따라 알맞게 감응한다.
지베르니에는 그 흔한 음악도 없고 탁자와 의자는 크기도 모양도 통일감 없이 제 좋은 곳에 놓여 있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나는 언제나 입구에서 먼 구석, 의자가 두 개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을 차지한다. 그 자리는 등 뒤쪽으로 다니는 사람이 없고 테이블 옆에 키 큰 스탠드등이 놓여 있어 책 읽기에 좋고 분위기도 그만이다. 내가 앉은 자리를 구석이 되게 해 준 벽 건너편에는 의자 네 개가 놓인 아늑한 공간이 또 있다. 나는 늘 그 자리가 궁금했다. 오늘은 망설이다 비어 있는 그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주인인 그가 메뉴판을 들고 오기에 넓은 자리를 혼자 차지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주인장은 뭐가 문제냐며 나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었다.
과거에는 꽤 넓은 거실이었던 듯한 홀에는 야트막한 가구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다. 이 가구들이 벽 구실을 하면서 따사로운 공간을 연출한다.
지베르니는 언제 찾아와도 어제 같은 익숙함이 있는 곳이다. 테이블은 귀퉁이가 닳았고 벽은 인상주의(impressionism) 화풍의 풍경화로 채워져 있는데 햇살이 잘 드는 유독 환한 흰 벽에는 정물화를 걸어두었다. 가구 옆에는 가구와 어울리는 그림이 벽을 장식했다. 보라색 꽃이 화면을 가득 채운 유화는 내 이름은 중요치 않다는 듯 작가 사인도 없이 걸려 있다. 그 옆으로는 녹색이 뒤덮은 연못 그림이다. 깊고 짙은 녹색이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모네의 정원’인듯한데 모작인지 역시 작가 서명 없이 날짜만 쓰여 있다. 액자는 통일감이 없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아마도 다른 날 다른 곳으로부터 왔다는 뜻이리라. 나는 이 무규칙한 정돈이 좋다. 무규칙은 사람을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러나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혼돈과는 구별된다.
낡았지만 병들지 않은 소품이 익숙함을 만들고 익숙함이 홀 이미지를 만든다.
손님 중에는 젊은 얼굴이 많지 않다. 이민 1세대들이 나이를 잊고 멋을 부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2인용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여자는 챙이 좀 넓은 모자까지 쓰고 맞은 편 남자와 얘기 중이다. 모자 밑 그녀 얼굴엔 굵은 주름이 앉았는데 그녀의 손짓과 몸짓은 열다섯 소녀처럼 화사하다. 이미지의 엇갈림이 묘하게도 수굿하게 얽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지베르니 분위기다. 또 다른 넓은 탁자에서는 네댓 사람이 둘러앉아 무슨 회의를 하는지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한반도 문제를 놓고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 모양이다. 나라 걱정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염려스러운 이들이다. 지베르니에는 시인, 화가, 나라를 걱정하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들이 지베르니 문화를 만들어간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 생가에 들렀었다. 그곳에서는 사랑을 찾는 사람들이 사연을 적어 줄리엣에게 보낸다. 자원봉사를 자처한 줄리엣들이 그 많은 메모에 일일이 답장을 해 준다고 했다. 상술로 보면 상술이지만 줄리엣에게 답장을 받다니 얼마나 로맨틱한 일인가.
지베르니 입구에는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나무 빛이 바랜 피아노가 놓여 있다. 피아노 위로는 철사로 조악하게 만든 메모함을 걸어두었다. 지베르니에 메모를 남겨 두고 떠나면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만 같다. 필연적 우연으로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뚜껑을 열어 건반의 울림을 듣고 싶어진다. 피아노는 깊은 울림으로 지베르니의 시간을 노래하리라.

이성숙

재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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