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는 인구 40만에 불과한 이탈리아의 조그만 중소도시이다. 이 도시가 유명한 것은 이곳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추정되는 볼로냐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1988년 9월 18일 이곳에서 세계 430여개 대학의 수장들이 모였다. 볼로냐 대학의 창립 9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더 중요한 행사는 바로 그곳에서 EU 주도 대학헌장에 이들 총장들이 서명을 하는 것이었다.
이 대학헌장은 1987년 유럽 대학 연합체의 총장이었던 카민 롬만치(Carmine Romanzi)의 후원하에 EU 몇몇 대학의 총장들에 의해 초안 되었고 그날 최종적인 비준으로 대학의 이념과 가치에 대해 규정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가 되었다. 현재까지 전 세계 88개 국가의 889개 대학이 이 헌장에 서명했지만 한국의 대학은 하나도 그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대학헌장의 기본적 내용이 학문의 자유와 이를 위한 대학의 자율성을 규정하는 것이었기에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던 한국의 대학이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지금 2018년 현재에도 한국의 대학들이 이 헌장에 참여하고 있지 않을까? 그 의문은 사실 이 대학 헌장의 내용과 지금의 한국 대학이 처한 현실을 비교하면 너무 쉽게 풀려버린다.
대학헌장에서 가장 중요시 되고 있는 원칙은 대학의 자율이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 문화를 창출하고 점검하고 전승시킨다. 이 헌장은 이러한 기능의 충족이 대학이 정치적 권위나 경제적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권위주의 정권 이후의 한국 대학은 이러한 점에서 당당한가? 많은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는 대학이 교육부의 산하기관으로 전락했고 교육부는 정권의 충실한 대리인이었다는 것이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권의 정치적 견해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시키며 다수의 역사학자에게 좌익이라는 굴레를 씌운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의 총장 선출에까지 관여하여 대학의 구성원들에 의한 민주적 총장 선출을 막았고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 많은 대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 전 이명박 정권에서는 대학의 교수들에게 상호 약탈적인 성과급적 연봉제를 비롯한 다양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지금 대학에서는 논문 쓰기 바빠서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견 성과급적 연봉제는 교수들을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지만 사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연구는 논문의 편수로 계량될 수 없다. 같은 전공 내에서도 어떤 연구는 몇 년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연구는 몇 달 만에 간단히 그 성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물며 수많은 상이한 전공들 간의 개량적인 상호평가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런 식이라면 어떤 연구자가 몇 달 만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를 제쳐두고 몇 년이 걸릴 수 있는 힘든 주제를 선택하겠는가? 이러한 정부개입이 계속된다면 우리나라에는 관제학문을 하는 관제대학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대학의 근본이념과 목적은 고등교육법에 수록되어 있지만 추상적 개념으로 여러 법 조항에 산재해 있고 대학의 운영과 관련한 기본적 내용은 국립학교 설치령 등에 총장이 교무를 통할한다는 규정이 전부다. 극히 행정 편의주의적인 생각에서 대학이 정의되고 있고 대학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파악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논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 보인다. 최근 몇몇 국립대학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무국장의 문제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모든 부분에서 교육부의 통제가 개입되고 있고 이 상황에서 그 매개자가 대학의 사무국장이니 대학의 실권자는 사실상 총장이 아니라 사무국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행정상 교육부 하부기구로 전락한 결과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이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가 아님은 분명한 것 같은데 대학의 자율성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 듯하다. 실제로 교육부는 중등교육을 교육청에서 관할하므로 대학 교육 관리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를 밝힌 바도 있다. 그러나 EU 주도 대학헌장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대학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아야 하는 기관이다. 이는 대학이 자율성이 보장되었을 때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간섭과 통제는 오히려 학문의 자유를 해칠 뿐이다. 교육부가 이러한 일을 제외하고는 할 일이 없다면 이전 모 대통령 후보가 한 말처럼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최인철

경북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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