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산 위에 저게 뭣꼬!”
1560년쯤 조선, 남명 조식이 고령 주산성 남쪽 능선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대가야 왕릉을 보고 놀라서 외친 말이다. 가야 6국 중 하나인 대가야는 서기 400년경부터 562년 사이에 고령을 중심으로 영호남에서 크게 성장한 국가이다.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리 44호와 45호를 비롯하여 왕족과 귀족들의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이 낙타 등처럼 울끈불끈 솟아 있다.
왜 가야는 신라와 다르게 왕을 평지가 아니라 하늘 아래 언덕에 묻었을까. 망자의 영혼이 하늘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죽어서도 높은 곳에서 도읍지를 내려다보며 백성을 지켜주려는 순정한 뜻이었을까. 능선 위쪽 높은 곳으로 갈수록 규모가 크고 신분이 높은 왕족이고, 아래쪽 낮은 곳일수록 귀족들의 무덤인 걸로 봐서는 권력을 상징하는 일종의 계급의식인지도 모른다.
봉분은 바다 위에 드러난 섬이다. 고분은 가야의 역사를 전해주는 언어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기록문화가 남아있지 않는 가야로서는 그 섬 아래 그들의 삶과 풍습과 정서를 읽을 수 있는 든든한 물증을 가지고 있다. 섬은 흔들리지 않는다. 갯바람과 거친 파도에도 묵묵히 버티는 섬처럼 세월이 가고 사람이 바뀌어도 역사는 변함이 없다. 봉우리 틈새마다 대가야의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대가야 왕릉전시관에 들어선다. 돌덧널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돌방구조 등 모형과 실물을 통해 실제 발굴된 무덤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실증 그대로, 거리낌 없는 세세한 표현에 고분을 직접 발굴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 든다.
오늘날 무덤과는 많이 다르다. 순장(殉葬)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애 터지게 한 목소리로 부르고 대답하는 곳이다. 적게는 5~6명에서 많게는 40여 명까지 순장을 당했다. 가야뿐 아니라 초기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풍습이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이나 그리스, 중국, 일본 등에도 흔한 사실이다.
순장. 사람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 같이 묻히는 일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강제로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세상인들, 어느 누구인들 죽음 앞에 두렵지 않은 자 있을까. 통치자나 남편이 죽었을 때 원하지 않아도 신하나 아내가 죽어 같이 묻혀야 했다. 지배층에게 생사여탈권을 장악당한 피지배층의 낮은 사회적 지위 때문이다. 지배층은 죽어서도 살아서와 같은 생활을 누려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사후세계에 필요한 일꾼이나 시종, 호위무사, 첩이나 신하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말 고대사회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을까.
순장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혼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묘는 자매가 나란히 누워 있기도 하고, 부부가 서로 머리를 반대편으로 두고 외출에서 돌아와 쉬듯 누워 있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어린 딸을 배 위에 누이고 함께 죽은 아버지도 있다. 애처롭다. 평소 “아버지 죽으면 나도 죽을 끼다! 참말이다, 참말!”하며 응석부리던 어린 딸의 목소리가 쟁쟁 들려오는 것 같다.
순장자가 혹시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운명처럼 받아들였거나, 두려워 도망갔거나, 아니면 한번쯤 억울함을 호소할 수나 있었을까. 무덤 속은 얼마나 어두울까. 도망을 간들 호위무사가 쫓아올 텐데 순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먹구름 같았을까. 무덤 속만 무서운 게 아니다. 지배계급이 가진 칼날의 그늘 아래 죽어서도 피지배계급으로 살기 위해 생목숨을 바쳐야 했던 우리들의 삶이 두렵고 비참하다.
현재의 시각으로 순장의 부당성을 판단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 의미의 해석은 아직도 유효하다.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제약 때문에 남편에게 필부종사한 조선의 여성들은 어떠한가. 남편이나 연인의 뒤를 따라 죽는 여인의 절개를 열녀로 칭송하였지만 그 불평등과 불합리가 반생명적인 관습의 미덕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의 ‘갑질’은 또 어떤가. 그런 것들이 어쩌면 현대판 순장은 아닐까. 나의 판단과 의지를 접고 윗사람이나 조직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상황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족을 위해 모멸감도 참아내야 하고 먹고살기 위해 자존감도 견뎌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어야 하는데 상처와 멍에를 홀로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일들, 억울하고 부당한 일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참아야 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아직도 많다.
고분군 능선을 따라 멀리 가야의 바람이 분다. 매미의 우화(羽化)처럼 저 깊은 땅속의 순장자들도 오래된 고통의 침묵에서 깨어나 세상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비상하기를 기대한다. 닫힌 세상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건너뛰라고 위로하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다.
이곳에도 시차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삶과 죽음 앞에 무력하기만 했을 순장 무덤을 보니 그동안 잘 살아왔는지,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이 먹먹해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삶 그 후를 지금 삶에 넣어보면 훨씬 삶의 폭이 넓어질 것 같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 살았는지 되돌아볼 기회”

수상소감


가야의 왕릉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령 대가야 봉분의 규모나 수량도 그렇지만 산등선을 따라 낙타 등처럼 줄지어 솟아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그것도 잠시.

유적지 입구 순장묘 전시관에 들어서자 갑자기 죽음에 의문이 일어서고 삶이 수상해졌다. 현세의 삶이 죽어서도 이어진다는 계세사상, 그 신념이 미더웠던 것이 아니라 그 특권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생명을 내놓아야 했던,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사회구조가 순간 열패와 자폐를 가져왔다. 1500년 전, 과거의 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먹고살기 위해서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집단과 이념을 우선으로 자유로운 삶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없고 남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여름이 꿈틀, 지나가고 있었다.
뜻 깊은 상을 받게 돼 기쁘다. 수필대전 참여를 계기로 앞으로 경북지역 여행길에서는 모든 유적이나 유물마다 더 깊은 관심과 애착을 갖고 대하게 될 것 같다.

△함양 출생
△단국대 사학과 졸업
△뉴욕문학 수필 등단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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