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습이 된 나이·권위 앞세운 갑질오직 성숙한 사람에게만나이가 경륜·품위·인격이 된다

또 도졌다. 그놈의 나이 타령이, 다른 곳도 아닌 국회에서 말이다.
“니가 뭔데?”. “니가? 너 몇 년 생이냐?”.
정부 예산안을 따지는 야당 의원의 발언에 여당 의원이 끼어들면서 제삼자들끼리 공방을 벌인 것이다. 시비를 건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51세로 재선이고 나이를 따진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56살의 초선이다.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이 망한 지 100년도 지났건만 그 후예들은 여전히 벼슬(선수)과 나이를 앞세운다.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의 경험과 연륜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들의 지혜와 살아오면서 쌓인 인내심을 존중하는 것이다. 나이는 유학의 세계를 넘어 21세기까지 여전히 사회공동체를 유지하는 한 축으로 유효하지만 사회적 관습일 뿐 법적인 효력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세상에서 나이를 들먹이면 세상 물정 모르는 꼰대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일상 언어생활에서 나이를 아예 무시하는 것도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 특히 우리말은 경어에 있어 독특한 체제를 갖고 있어 유학생이나 외국인 근로자들이 어려워한다고 들었다. 동남아에서 온 근로자가 사장에게 반말을 했다가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는 사장의 지시에 성실히 응대했는데 사장에게는 친구 대하듯 반말로 대꾸한 것으로 보였다는 거다. 같이 먹자는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거꾸로 사물을 존대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번에는 열 살 초등학생이 50대 운전기사에게 막말을 퍼부었다고 해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어느 언론사 사주의 딸이 운전기사에게 “아저씨 바본가 봐” “일단은 잘못된 게 네 엄마, 아빠가 널 교육을 잘못시키고 이상했던 거야” 뭐 이런 식으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운전기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너’라고 하면서 어른을 몰아붙이고 있다.
시대를 거슬러 왕조시대 영화를 보는 듯, 춘향전이라도 읽은 듯 착각이 든다. 공주님이 시종에게 훈계하는 투의 막말은 시계를 200년 300년 뒤로 거꾸로 되돌려 놓은 듯하다. 영화에서는 공주님이 시종에게 명령을 하거나 꾸중을 내려도 말은 아주 예쁘게 했다. 공주의 품위를 지켰다.
밀폐된 차 안에서 운전기사와 고용자인 사장 딸이 어떤 상황 아래에서 어떻게 무슨 대화를 하다가 저런 지경까지 발전했는지 전후 사정을 모두 살펴보지 않고서는 단언할 수 없긴 하다. 그러나 단둘이 나눈 대화가 녹음이 돼서 세상에 공개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개까지 결심한 운전기사의 속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제 석 달 남짓 운전기사로 일했는데 이 사건으로 해고되고 지금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고 하니 쉽게 잠잠해 지지는 않을 듯하다.
예절을 논한다면 그 원조는 단연 맹자다. 맹자는 “조정에서는 벼슬이 제일이고, 시골에서는 나이가 제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덕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금이 자신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고 ‘벼슬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있다’며 그 이유를 설명한 말이다. 벼슬이나 나이로만 따지지 말라고 그랬다. 실제로 우리 선조들은 나이를 떠나 교류를 했던 사례들을 역사에서 보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벼슬이나 나이로 상대를 제압하려 드니 적폐청산은 여기에도 필요한 것 같다.
유교의 가르침이 나라를 온통 골동품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맹자도 공자도 따지고 보면 막무가내 나이나 벼슬을 앞세웠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위아래를 따졌던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학습되지 않은 후대에 와서 머리와 꼬리는 잘라 버리고 나이나 권위만 앞세워 갑질을 해대는 것이 오늘날의 인습이 되어 버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거나 거짓말을 했다가 들켰거나 또는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 꺼내는 트집이 나이 타령일 때가 많다. 말꼬리를 잡아 어투가 어떻다느니 트집을 잡는 치졸함이다. 벼슬이 모두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벼슬도 아니다. 오직 성숙한 사람에게만 나이가 경륜이고 품위고 인격이 된다.

이경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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