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올라가는 주차장 문에 감격자잘한 일상이 탈 없이 굴러가는 것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


거의 한 달을 낡은 주차장 셔터 리모컨 바꾸는 일로 소진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주차장 셔터를 여닫는 리모컨이 작동하다 말다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건전지를 갈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오늘 멈춰버린 것이다. 주변에서는 건전지를 잽싸게 바꾸지 않은 나의 게으름을 탓했지만 내게는 오직 자신만이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기계나 전자제품 만지는 일에 천성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어찌어찌 어르면 리모컨이 말을 듣기도 했으니 좀 더 버텨왔던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아 가면서 은근히 누가 대신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갑자기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자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외출할 때마다 매번 수동으로 주차장 문을 올리고 차를 빼낸 후 다시 종종걸음으로 뛰어가서 주차장벽에 붙어 있는 셔터 닫힘 스위치를 작동해야 했다. 그런 후 다시 힐을 신은 채 동동동 달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진을 빼고 운전대를 잡으면 피곤이 몰려왔다. 건전지 사러 어디로 가야 할까 여기에 맞는 건전지는 뭘까,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려니 에너지가 많이 든다. 남에게 쉬운 일이 내게 쉽지 않을 때 삶은 고단해진다. 나는 리모컨을 통째로 들고 자동차 부품을 전문으로 파는 오토존 매장부터 찾았다. 건전지를 갈아야 할까 리모컨을 교체해야 할까 물었다. 직원은 리모컨을 갈아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혹시나 싶어 건전지를 사들고 나왔다. 집에 와서 주차장 앞에서 건전지를 교체한 리모컨을 눌러봤지만 셔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토존 직원의 말이 맞는가 보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든다. 건전지를 환불하러 가야 하는데 운전을 하고 다시 집을 나서자니 성가시다.
다시 또 며칠이 흘렀다. 미국 생활 오래 한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니 홈디포에 가보란다. 홈디포는 집수리에 필요한 각종 자재와 잡동사니를 모아 놓고 파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1950년대 초 형성된 마을이다. 거의 70년이 다 된 마을이고 내 집 역시 그때 지어졌다. 미국 사람들은 오래된 집이나 낡은 물건을 자주 버리거나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고쳐 쓰고 닦아 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새것을 좋아하는 한국이 30년만 되면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것과 대조된다. 문제는 그동안 주인이 바뀌면서 조금씩 수리된 집들이 있지만 내 집은 내가 사기 전 먼저 주인이 40년 넘게 살아온 집이라 내부 건 외부 건 외양은 깔끔하게 관리는 되어 있었지만 속사정은 곳곳이 수리를 요했다. 나는 이사를 오면서 인테리어 공사를 새로 했다. 내 집은 동네에서 가장 늦게 리모델링한 집이 되었다. 문제는 주차장 공사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돈도 아껴야 했고 보기에 말끔했기 때문이다. 실내가 아니라 그리 신경 쓰이는 공간이 아니기도 했다.
홈디포 직원은 내가 들고 간 리모컨을 보더니 난색이다. 이 모델은 90년대 초 단종되었다며 같은 회사 다른 제품을 가져가 보라며 건넨다. 안되면 다시 바꾸러 오라는 친절함과 함께. 깨알 같은 잔글씨 제품 설명서에는 1995년도 이후 주차장에 사용할 수 있다는 문구가 특별히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나는 속으로 먼저 주인이 그동안 주차장 셔터를 한 번쯤 교체했기를 바라면서 그걸 사들고 왔다. 오자마자 포장을 뜯고 본래의 리모컨과 새 리모컨을 옆에 두고 코드를 조정했다. 원 리모컨과 같은 코드를 새 리모컨에 입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다리를 놓고 주차장 문 센서박스를 열었다. 40년 묵은 먼지가 낡은 이불솜처럼 눅진하게 쌓여 있다 덩어리로 떨어진다.
설명서대로라면 센서박스에는 재설정 버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집 주차장 센서박스에는 아무리 찾아도 재설정 버튼이 없다. 낭패다. 주차장 설비 전문가를 찾아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쩌면 주차장 도어 시스템을 몽땅 교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몰려왔다.
인건비가 비싼 나라다 보니 미국 사람들은 간단한 집수리는 본인들이 예사로 한다. 취미로 목공이나 집수리를 하는 사람도 꽤 있다. 그러나 건축에 취미가 없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곤혹스런 일이다. 사람을 부르면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차치하고, 목공도 전기도 모르고 도대체 어디 가서 사람을 찾아야 할지조차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진땀을 뺀다. 결국 주차장 셔터는 당분간 더 열리지 않게 되었다. 쇠심줄 같은 며칠이 지났다. 사는 게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자잘한 일상이 탈 없이 굴러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 감사를 잊고 살던 뇌세포가 자동 리셋 중이다. 수선 떨며 외출전쟁한 지 다시 사흘째, 주변 도움을 받아 주차장 설비하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간단히 인터넷으로 리모컨을 주문한 후 물건이 도착하면 구형 리모컨 코드를 똑같이 입력해보라고 했다. 그는 고맙게도 출장비도 안 받고 돌아갔다. 1주일을 기다려 리모컨이 도착했다. 거의 2주 만에 주차장 출입이 자유롭게 되었다.
리모컨 작동으로 주차장 문이 스르륵 올라가던 순간 나는 감격에 빠졌다.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싶은 가슴 뜨거운 안도감이 몰려왔다. 위대한 예술작품 중에는 일상을 담아 낸 것이 많다. 가치 있는 창작은 리얼리즘적 본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낡은 리모컨으로 일상이 기적임을 배웠다.

이성숙

재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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