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호국 사찰 대둔사

▲ 대둔사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인 446년에 창건했다. 이후 화재 등으로 불에 탄 것을 여러 차례 중건했다. 조선시대 들어 사명대사가 중건하고, 승병 10만 명을 주둔시켰다. 현재 사찰 터는 당초 대둔사 터가 아니라,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곳이다.
▲ 대둔사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때인 446년에 창건했다. 이후 화재 등으로 불에 탄 것을 여러 차례 중건했다. 조선시대 들어 사명대사가 중건하고, 승병 10만 명을 주둔시켰다. 현재 사찰 터는 당초 대둔사 터가 아니라,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곳이다.

불교는 왕족들이 민심을 달래고 하나로 모으기 위한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온전히 이 땅에 뿌리내린 불교는, 그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며 국교의 위치까지 오른다.
세상살이의 팍팍함을 달래주고 연회를 베풀어, 백성들에게 짧은 순간이나마 미래에 대한 기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했다.
왕족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성장한 불교는, 외세 침략기에는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에도 불구하고, 목탁과 염주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외세와 맞서며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지켰다.
호국 불교의 역할을 든든히 한 셈이다.

◆호국 사찰 대둔사, 사명대사 10만 승군 주둔

구미시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기슭 평평한 곳에 앉은 대둔사는 호국 사찰이다.
사명대사 유정이 조선 선조 39년(1606) 중건한 후, 10만 명의 승군을 주둔시켰다고 한다. 구미시 무을면 수다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둔사는 신라 눌지왕 때인 446년,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는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
이후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의 침략으로 불탄 것을 충렬왕 때 왕자 왕소군이 출가해 중창하고, 유불교체기 다시 폐허가 된 것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가 암자를 10개나 거느린 큰 규모의 사찰로 중건했다.
사명대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둔사의 시련은 계속됐다.
일본 강점기 때는 사찰의 모든 암자가 해체되고, 시왕전의 불상마저 진주의 어느 사찰로 옮겨 가는 수난을 겪었다.
최근 들어 신도들의 모금으로 여러차례 중수해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현재 전각이 놓인 위치는 당초 대둔사가 있던 자리가 아닌,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자리다. 대둔사 터는 여기서 서남쪽으로 300여 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대웅전과 명부전, 응진전, 요사채, 삼성각 등의 전각이 남아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말사다.

◆유물, 유적

▲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33호)은 종이와 삼베를 몇 겹씩 발라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불상이다.
▲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33호)은 종이와 삼베를 몇 겹씩 발라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불상이다.

대둔사에는 2점의 보물이 있다.
하나는 보물 제1633호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난해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한 대웅전(제1945호)이다.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종이와 삼베를 몇 겹씩 발라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건칠 불상이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왕자 왕소군이 출가해 대둔사를 중창할 당시에 조성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불상의 형태로 보아 이보다 좀 더 늦게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양손만 나무로 제작하고 나머지는 모두 건칠로 제작됐다.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은 나주의 심향사 건칠여래상 등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만 확인됐는데, 대둔사의 아미타여래좌상의 등장으로 경북도에서도 고려 후기 건칠여래상이 조성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특히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그 규모가 1m가 넘는 큰 규모로 관심을 끌고 있다.
대둔사 대웅전은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11월 보물 제1945호로 지정됐다.
1987년 대웅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상량문에는 광해군 6년(1614년)에서 순조 4년(1804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수리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웅전은 지형이 낮은 앞쪽에 석축을 높이 쌓고 가운데에 계단을 두었다.

▲ 대둔사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이다. 건립 당시의 단청과 문양이 남아 있다.
▲ 대둔사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이다. 건립 당시의 단청과 문양이 남아 있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하고, 자연석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이다.
내부는 우물천장을 하고 있고, 닫집의 조각이 섬세하다.

▲ 대웅전의 꽃살 여닫이문. 대둔사 대웅전은 2017년 11월 보물로 지정됐다.
▲ 대웅전의 꽃살 여닫이문. 대둔사 대웅전은 2017년 11월 보물로 지정됐다.

대웅전 정면에 있는 꽃살 여닫이문과 뒷면 오른쪽의 영쌍창(창호 가운데 기둥이 있는 창)이 고전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건립 당시의 단청문양이 잘 보존돼 있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대둔사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층집이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 대둔사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층집이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는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층이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의 또 다른 이름은 지장전이다.
윤회 과정에서 지옥 중생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 구원해 내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다.
명부전에는 망자를 심판하는 열 명의 심판관이 있어 시왕전(十王殿)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대둔사 명부전에는 ‘유명도’ 1폭과 역대 제선사의 진영 5폭이 봉안돼 있다.
건물의 조성연대는 대웅전과 비슷할 것으로 짐작된다.
대둔사의 대웅전 북쪽 언덕에 응진전이 있다.
17세기 후반 조성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집이다.
응진전 안에는 토제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돼 있으며, 중앙 본존을 비롯한 협시보살상은 모두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명부전 옆에 있는 소형의 당간지주. 당간지주석의 북쪽 측면에 ‘강희5년병오(康熙五年丙午)’라는 글귀가 있어, 1666년(현종 7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 명부전 옆에 있는 소형의 당간지주. 당간지주석의 북쪽 측면에 ‘강희5년병오(康熙五年丙午)’라는 글귀가 있어, 1666년(현종 7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명부전 옆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소형인 대둔사 당간지주는 북쪽 측면에 ‘강희5년병오(현종 7년, 1666년)’ 라는 글귀가 있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

◆대둔사 가는 길

대둔사는 선산에서 상주 낙동까지 선상서로를 따라가다, 옥성면 구봉리 못미처 왼쪽으로 난 산촌옥관로를 따라 3.5㎞를 더 가면 된다.
산촌옥관로를 따라가다 보면, 밭이었는지 논이었는지 알 수 없는 농지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을 쌓아 둔 곳이 있다.
‘돌무지’라고 표기한 큰 입석이 아니더라도, 그 수와 규모만으로도 눈길을 끈다.
이곳을 지나 좀 더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둔사 700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작은 다리를 건너, 산을 오른다. 서늘한 늦가을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훑고 지나간다.
대둔사는 복우산 중턱에 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은 대둔사 마당에 서면 감탄사로 바뀐다.
탁 트인 전망에 멀리 보이는 첩첩의 산맥들과 골짜기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고찰 대둔사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장막을 친 복우산 품에 안겨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대웅전 처마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고요한 산사를 깨운다.
원래 대둔사는 이보다 서남쪽 30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터는 산내 암자였던 청련암이 있던 곳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전각이다.
석가모니부처는 모든 번뇌를 쓸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었기에 위대한 승리자요,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대웅)에서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불렀다.
석가모니 부처와 함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협시보살로 모신 경우를 높여서 ‘대웅보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둔사의 대웅전은 다포계, 겹처마 아래 독특한 문양과 조각을 갖추고 있다.
색 바랜 단청과 문양들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눈길을 끈다.
이 큰 나무와 부재들을 일일이 조각조각 깎아 서로 맞물리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했을까.
대웅전과 명부전을 돌아 절 앞마당에 섰다.
늦가을이라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 만도 한데, 깨끗하다. 이 사찰 주인의 깔끔한 성품이 너른 절 마당에 비쳐든 듯하다. 내 마음의 뜨락도 저절로 정갈해진다.
조용한 산사를 말없이 거닐다 보면, 어느새 들뜨고 복잡한 세상이 좀 더 단순해지는 것 같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복잡하기만 한 세상 때문에 우리의 몸은 온종일 세파에 시달리고 있다.
잠시라도 세상의 일은 잊어버리고, 의미 없는 온갖 화려한 시각적인 자극을 멀리한 채 이렇게 조용한 산사의 뜰을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걷노라면, 잠시동안 이나마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또 다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 대둔사 마당 한쪽 화단에 제철을 잊은 채 피어난 불두화.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대둔사 마당 한쪽 화단에 제철을 잊은 채 피어난 불두화.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찰의 주인은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마당 끝에 화단을 만들고, 메리골드라고 부르는 천수국과 맨드라미, 천일홍, 국화 등 여러 종류의 꽃을 심었다.
진한 자주색의 맨드라미보다, 잎을 모두 떨구고 제철을 잊은 채 두어 송이 하얀색 꽃을 피워 낸 불두화에 눈길이 간다.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하고, 부처가 태어난 4월 초파일을 전후해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백당나무를 개량한 종인데, 백당나무 꽃에서 암술과 수술을 없애고 꽃잎만 겹겹이 자라게 한 원예품종이다.
이 때문에 꽃 속에 꿀샘이 없고, 번식할 필요가 없어 향기도 없다.
꿀샘이 없으니, 벌과 나비도 외면해 생명이 없는 조화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꽃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꽃들은 피기 전이나 피어나면서 꽃잎을 활짝 열지만, 불두화는 꽃을 피운 상태에서 계속 꽃을 키우고, 연초록에서 흰색으로 색깔을 바꾼다.
철모르고 핀 대둔사 마당의 불두화를 보면서 모든 식물이 겨울잠을 재촉하는 이 시기에 왜? 꽃을 피웠는지 궁금해진다.

◆주변 관광지

구미 옥성면에 있는 대둔사는 상주시 낙동면의 경계지역에 있다.
근처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구미시 승마장이 있다.
인근 낙동면을 가면, 낙단보를 둘러보고 강변에 줄지어 들어선 한우 식당에서 저렴한 가격에 한우를 맛볼 수 있다.
또 대둔산에서 내려와 만나는 산촌옥관로는 선산까지 이어진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져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청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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