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장려상 - 왕피천 봇도랑 길 / 배재록

2018 경북문화쳏머 전국수필대전



주상절리를 닮으면서도 포석정 같은 길, 원시적이면서 생명의 의미가 담긴 길이 있다. 강의 맥박을 느끼며 기암절벽 아래를 걷는 그 길이 왕피천 봇도랑 길이다. 봇도랑은 들판에 물을 끌어들이는 전통농업의 문화유산이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력으로 지렛대와 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쪼개고 굴을 뚫어 봇도랑을 만들었다. 천수답에 생명의 젖을 내어주는 봇도랑이다. 이 길이 유명한 것은 자연박물관을 방불하게 하는 최적의 탐방 코스이기 때문이다. 삶에 덧난 상처를 치유해 주는 신력 같은 길이다. 왕피천의 웃음 같은 어쩌면 눈물 같은 물길 앞에 섰다. 걷는 행위는 원초의 즐거움이 따랐다. 걸으면서 다리를 흔들어 놓으니 사유가 생겼다. 대자연의 스튜디오에 초대받았으니 잠자던 잠재력이 무더기로 뛰쳐나와 진한 사유를 종용했다. 눈길을 줄 때마다 다르게 보이고, 상상력을 자극해 글을 만들어주었다. 그 위대한 자연이 전하는 공명을 받아 적으며 묵직한 수필로 옮겼다.

한 모퉁이를 돌아가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길 아래는 지치지 않고 흐르는 왕피천 물이 은빛 물비늘을 일으키며 우렁우렁 흐른다. 좁다란 외줄기 봇도랑 길을 따라가면 치솟은 산과 하늘과 은빛 강물의 풍광이 무던하던 가슴을 감동하게 만든다. 절벽, 봇도랑, 강물, 모래톱과 자갈이 어우러진 모습은 별천지다. 노천에 핀 꽃이 되어 감흥을 자극한다.

왕피천 봇도랑 길, 일명 은어길은 2억 년의 시간을 지내왔다는 동굴 성류굴을 1.5km 지나 근남면 구산2리 성산지 못에서 출발한다. 은어가 산란을 위해 바다에서 왕피천으로 거슬러 올 때는 장관이라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차로 아홉 구비 길을 돌아야 도착하는 마을인 굴구지까지 2.2km 길이다. 출발에 앞서 지하금강이라 불리는 성류굴 탐방을 하여 안성맞춤이었다. 은하천오작교 등 12개의 광장에 저마다 종유석과 석순이 270m 펼쳐져 비경을 뽐내며 호강을 시켜주었다. 굴 탐방 소요 시간은 30여 분이면 충분했다.

탐방로가 개발되기 전에는 태풍 매미로 봇도랑은 파손이 되어 제 기능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다. 울진군에서 특색 있는 걷기와 탐방코스로 다시 개발하여 가는 곳마다 풍경과 역사와 사색을 하게 했다. 출발지인 백발 소는 마을 아이들이 소를 풀어놓고 멱을 감고 놀던 곳이다. 해맑은 내 유년의 기억과 꿈이 고스란히 살아 움직인다. 왕피천을 풀어 놓고 높은 산 앞섶에 숨겨져 있는 추억을 불러내 본다. 코에서 물이 나오도록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추억이 은빛 물줄기를 따라 일어선다. ‘구보 소’, ‘종대방우 아가리’, ‘ 까치 소’, ‘긴 언덕 아래 소’는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온 지명이다. 대자연에 걸맞게 이름조차 그대로 사용했다.

은어길 일부 구간은 봇도랑에 모래를 채워 예쁜 길을 만든 곳도 있다. 탐방로 가에는 안전을 위해 지지대를 만들거나 데크를 깐 곳도 여러 곳이다. 터널로 된 구간이 3곳이 있는데 길이 25m, 높이 130cm 정도 크기이다. 지렛대로 구멍을 뚫고 정으로 단단한 바위를 뚫었다.

왕피천 물줄기를 따라서 절벽 아래를 왕복 2시간 걸었다. 걷기는 풍경을 선물했다. 역사를 음미하고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주었다. 민가도 없고, 인간의 때가 묻지 않고 오직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곳. 한반도 이남에서 가장 험준한 오지 중의 오지 왕피천 봇도랑 길이다. 병풍처럼 불쑥 솟아오른 기암절벽은 산양이 사는 곳이다. 척박한 돌 틈 사이에서 나무들이 녹색 치맛자락 휘날리며 싱싱한 생명력을 뽐낸다. 1급수 왕피천의 물을 마시고 자란 식물의 풍경이 그래서 절색인가 보다. 내 유년에 멱 감고, 천렵하며, 꿀꺽꿀꺽 마셨던 강물이라 감회가 새롭다. 왕피천은 나에게 가난의 기억과 절망의 시간이 배어 있는 고향이기도 하다. 야수 같은 물줄기가 바위를 넘으며 높이 솟구친 뒤 들쭉날쭉 암초 위로 산산이 부서진다. 물줄기의 일부는 봇도랑으로 흘러 젖줄 같은 생명수로 변한다. 그 생명수 봇도랑에 들어선 물고기들을 잡으며 놀던 추억이 얼핏 스쳐 간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금강송의 아름다움이 감흥의 샘을 한껏 퍼 올린다. 아름다움은 숲 사이로 따라오며 시원한 눈 맛을 선사한다. 숲이 주는 피톤치드에 맑아오는 기운이 편린을 몰아내기 시작하고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뭐든지 다해 줄 것 같다. 메아리의 진한 여운이 감흥의 뇌세포를 자극한다. 사람들 시선에서 벗어나 둘만의 럭셔리함과 프라이빗함을 즐길 수 있는 곳. ‘신들의 정원’이라 해도 좋은 자연 그대로가 숨 쉬는 곳이다. 고요한 자연의 땅. 때 묻지 않은 왕피천이 흐르는 곳에 있는 봇도랑 길을 걷는다.

왕피천은 영양군 수비면 금장산(849m)에서 발원하여 총 61km를 굽이굽이 동해로 흘러가는 1급수 물길이다. 일반 민물어종은 물론 수달, 까막딱따구리, 딱새, 황어, 은어 등 희귀동식물들을 키워준 생태의 보모다. 쉼 없이 흐르는 왕피천 물결은 억겁의 시간을 두드려 바위를 매끈하게 다듬었다. 스스로 바위를 타고 넘느라 하얀 물결을 만든다. 물길을 방해하면 분노 색을 띠나 보다. 듬성듬성 놓여 있는 용의 알 같은 둥근 바위들이 고운 결을 드러낸다. 마치 연못에 피는 연꽃같이 아름답다.

산이 높아 왕피천 봇도랑은 홍수를 피하려고 강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봇도랑은 강과 평형이 되는 곳까지 길게 이어져야 물을 댈 수 있다. 강에 보를 만들고 그 통로를 인력으로 만든 봇도랑이다. 총길이 2km인 왕피천 봇도랑은 논배미에 줄 생명의 젖을 묵묵히 실어 날랐을 것이다. 왕피천의 험준한 굴곡을 고스란히 본떠서 끊어질 듯 아스라하게 이어지는 봇도랑 길이 산에 흰색 테두리를 쳐놓은 것 같다. 굽이치는 곡선 묘미가 관능적이다. 달리 보면 마치 꾸불꾸불 기어가는 구렁이를 닮았다.

작년에 일본 교토 ‘철학의 길’을 걸었다. 2.5km 하천을 따라 걸으며 사색해서‘교토학파’를 낳은 길이다. 이에 비해서 왕피천 봇도랑 길은 ‘농자천하지대본’ 생명의 젖을 실어 날랐던 위대한 길이 아닌가. 하류의 왕피천은 더 낮게 흐르기 위해 깊은 소를 곳곳에 만들었다. 그래야만 수많은 생명체에 젖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웅숭깊어진 시퍼런 소가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 늘 겸손하고 속 깊은 정을 베푸는 소를 닮을 일이다.

왕피천 물결은 자유를 찾아 자연스러운 형상을 드러내며 아래로 흐른다. 유려한 곡선과 특유의 물색을 띠며 장애물을 유연하게 뛰어넘으며 우렁우렁 흘러 동해로 여행 간다. 물줄기도 때로는 잠시 멈추어 쉬었다 다시 흐른다. 미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멈춘다. 그래야 고요할 수 있고 앞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치유하며 ‘일신우일신’ 나아간다. 더러는 고요한 물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아 명경지수와 같은 풍광이 보인다. 괴암절벽에 서서 바람에 춤추는 소나무가 물속에 비쳐 최고조 풍경을 준다.

산천은 자연적인 캠핑장과 청소년 야외수련장을 만들어 놓았다. 말을 타고 달렸던 화랑들이 놀던 자리도 이곳만은 못했을 것이다. 절벽 바위가 수억 년 동안 떨어져 쌓인 곳 ‘테일러스’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봇도랑 길의 장관에 눈과 마음은 호사를 누린다. 왕년에 생명의 젖줄이었던 왕피천 봇도랑 길을 걸었다. 수려하고 신력 같은 풍경에 구겨진 마음 자락까지 치유가 되어 기분은 날아갈 듯 행복하다. 오지여서 숨어 있던 원시적인 자연환경. 봇도랑 길은 최고의 힐링이었다.

“날선 인식 바탕으로 희망과 지성이 되는 글 쓰고파”수상소감


내 안태고향 울진 왕피천 ‘봇도랑 길’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전통농업의 유산이 힐링 농업으로 관광자원으로 변모한 성공사례가 사유를 하게했다. 사라져가는 농업의 현실을 직시하고 변신의 미래를 엿보게 수필로 표현을 했다.

자음과 모음을 잘 엮은 촉수로 전통농업 부흥의 날선 소회를 피력했다. 감성을 희롱하는 원시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왕피천의 역동적인 풍경을 묘사했다. 대자연 가르침을 준 우렁우렁 흐르는 왕피천이 일필휘지를 하게 했다. 

생명의 젖줄을 간직한 향수가 글쓰기 본능을 자극해 문화체험 수필응모로 이어졌다. 매혹적인 봇도랑 길에 거는 장밋빛 미래가 앞장서 유혹하며 퇴고를 종용했다.

자유를 꿈꾸며 흐르는 왕피천처럼 희망과 지성이 되는 글을 쓸 각오다. 날선 인식과 형상화 훈련으로 그윽한 문향을 맡는 날까지 오체투지로 글을 쓸 참이다.

정진의 기회로 수상을 안겨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힘찬 폭포가 되게 다리를 놓아주신 문우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에세이문예, 울산공단문학, 곰솔문학, 울산문인협회 문우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경북 울진 출생

△2017년 제9회 목포문학상 수필 본상수상

△2018년 제13회 머니투데이경제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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