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격동시대의 정치인 백남억

▲ ‘10ㆍ2 항명 파동’의 빌미가 됐던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 ‘10ㆍ2 항명 파동’의 빌미가 됐던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당시 정계의 지형을 바꾼 ‘10ㆍ2 항명 파동’은 권력의 속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다. ‘10ㆍ2 항명 파동’은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1971년 국회 본회의에서 여당 일부 세력이 주도적으로 가결시켰던 사건이다.
‘실미도사건’은 특수부대가 실미도에서 북파를 위해 지옥훈련을 받던 중, 인천으로 진출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진입하려던 사건이다. 그 후, ’실미도사건은 소설과 영화로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그 진상은 아직 베일에 쌓여있다.
‘광주대단지사건(廣州大團地 事件)’은 1971년 8월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해 일으킨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
이는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투쟁이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10ㆍ2 항명 파동’은 일견 중대한 사건을 책임지고 있던 소관 장관에 대한 일종의 책임 추궁이었으나 실상은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한 항명 사건이었다. 항명을 주도한 인사들은 당시 공화당 실세 4인방으로 불렸던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이었다. 삼선개헌을 주도한 공을 내세워 4인방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자 박 대통령은 친 김종필 계 구주류였던 오치성을 내무부장관에 기용해 4인방을 견제할 요량이었다.
이에 4인방이 일대 반격을 가한 것이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사건이었다. 반격 찬스를 노리던 중, 야당이 빌미를 제공했고 4인방이 거사에 성공한 셈이었다.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신주류 4인방 중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계를 은퇴해야 했고, 백남억과 김진만은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야 했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10ㆍ2 항명 파동’을 유신체제를 도입해 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백남억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천ㆍ상주 선거구에서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이때는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백남억은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겸 총재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정계 은퇴

1978년 백남억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김천에서 출마했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 백남억은 정계를 은퇴했다.
1988년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에 취임했고, 1991년 서봉문화재단(성균관대학교 운영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9월15일 백남억은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고향인 김천의 금릉공원 묘지에 묻혔다. 유족으로 백종현(白種玹) 전 국민대 경상대학장 등 3남 1녀가 있다. ‘단독범의 이론’, ‘형법총론’ 등 저서를 남겼다.
오철환 칼럼니스트

연보
1914년 11월11일 김천에서 아버지 백낙준과 어머니 김금옥 사이에 출생
1928년 봉계공립보통학교 졸업
1931년 대구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시, 독서회사건으로 퇴교
1936년 보성전문학교 법과 졸업
1939년 일본 규슈제국대학교 법문학부 졸업, 평양철도국 입사
1941년 부산철도국 재직·박갑규 여사와 결혼
1947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조교수
1955년 교환교수로 도미,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형사법 연구
1958년 경북문화상(학술부문) 수상
1959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대학원장
1960~1973년 제5, 6, 7, 8, 9대 국회의원
1964년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1970년 민주공화당 의장
1973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1988년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
1991년 서봉문화재단(성균관대 운영재단) 이사장
2009년 9월15일 87세를 일기로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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