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 최초의 가람 도리사

▲ 도리사 찾아가는 길에 만난 태풍 ‘콩레이’가 만든 폭포.
▲ 도리사 찾아가는 길에 만난 태풍 ‘콩레이’가 만든 폭포.

구미시 해평면의 ‘도리사’는 최초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지은 사찰이다. 아쉽게도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그 도리사는 아니다. 17세기 중엽 원인을 알 수 없는 큰불로 도리사가 모두 불에 타면서 불상을 도리사 위쪽에 있던 금당암으로 옮겨 이름을 도리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리사는 냉산 중턱 아름드리 소나무가 둘러쳐진 양지바른 곳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태조산 도리사’라고 쓰여 있지만, 기록에는 ‘냉산 도리사’라고 전해진다.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가 직접 구미시 해평면 냉산 아래 지은 사찰이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중국 양나라에서 전해져 온 ‘향’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향으로 성국공주의 병을 고친 이적을 기념하고자 매년 ‘향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도리사의 흥망성쇠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아도가 당시 신라의 수도인 계림을 다녀오던 중 한겨울에 산 중턱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자두꽃)이 핀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가 눌지왕 2년(418)이다.
이후 신라불교 성지가 된 구미(당시 일선)에는 도리사를 중심으로 주륵사, 죽림사, 법륜사, 보천사 등 큰 사찰이 잇따라 세워졌다. 이와 더불어 죽장리 5층 석탑, 낙산리 3층 석탑, 도리사 화엄석탑, 원리 3층 석탑, 주륵사 석탑, 등 거대한 석탑들이 들어섰다.
아마도 신라불교 최초 전래자인 아도가 창건한 절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불교가 꽃을 피웠던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많은 신도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1천여 년 넘게 이어 온 도리사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도리사의 쇠퇴와 관련한 전설이 하나 있다. 도리사 절 옆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이 샘의 물을 마시면 힘이 장사가 된다는 것. 이 샘물을 마신 한 스님이 매번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렸는데, 한 선비가 이를 보다 못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도리사에 들어가 “앞산에 큰 돌산을 하나 만들면 절이 더욱 흥하리라”고 선동했다. 결국, 샘물을 마시고 힘이 남아돌던 스님들이 스스로 돌을 나르기 시작해 불과 일 년여 만에 몇 개의 돌산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돌산이 생겨난 후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화재까지 발생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도리사는 배가 떠 있는 등선형인데, 돌산을 만들어 배가 침몰한 형국이 됐다는 것.
스님들이 만들었다는 이 돌산은 1958년 낙동강 호안공사를 하면서 모두 옮겨져 현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마지막 돌을 옮길 당시, 천둥과 폭풍우가 심했다고 한다. 돌산이 없어진 후인 1976년과 1977년 석승상과 세존사리가 발견돼 많은 불교인들에게 경사를 안겨줬다. 설화지만 어찌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도리사는 숙종 3년(1677) 큰 불로 모든 건물이 재가 됐다.
물론, 도리사의 창건과 쇠퇴는 우리나라 불교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왕권에 의해 들어온 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고려후기 신진사대부들이 수입한 성리학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서서히 그 존재감을 잃어갔다.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던 도리사는 현대에 들어서야 그 빛을 보게 됐다. 등선형의 도리사를 짓누르고 있던 돌산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금동 6각 사리함과 그 속에 세월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보관돼 온 세존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면서다.
도굴로 방치돼 절 밖에 있던 석종형 사리탑을 경내로 옮겨 와 복원공사를 하던 중, 1977년 4월18일 그 속에 금동사리함과 진신사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불교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리함은 6각으로 표면에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음각 돼 있는데, 기존에 발견된 사리함이 사각형이거나 8각형인데 비해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조성연대는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때 가져온 진신사리로 추정된다.

◆도리사 가는 길

도리사의 시작은 일주문부터다. 도리사는 이 일주문에서 5㎞쯤 떨어져 있다. ‘신라최고가람 태조산도리사’라는 일주문 현판 아래를 지나면,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2㎞쯤 이어진다. 한국의 가로수길 62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가로수 길이다.
일주문이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시작점이라면, 전성기 때 도리사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2㎞에 걸쳐 길게 늘어선 이 느티나무 가로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터널을 이뤄 도리사를 찾는 방문객들을 온전히 도리사 한곳으로만 집중시킨다.
누가 있어 신라 최초 가람 도리사 방문을 이리 환영해 줄까? 이 길을 지나가려면 마치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설렘과 호기심, 그리움이 교차한다. 그래서 사찰의 일주문은 ‘속세와 내세를 가르는 경계’라고 하는가 보다.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끝나면 도리사까지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다. 꽤 큰 주차장을 갖춘 이곳엔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전통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들어서더니, 최근엔 유행을 타고 현대적 감각을 갖춘 커피숍까지 생겨났다.
절 아래는 조용하더니 경내는 제법 사람들로 북적인다. 많은 절들이 점점 주는 신도들을 붙잡고 새로운 신도들을 모으고자 음악회나 법회, 축제 등을 여는 것이 요즘 추세다.
불교 용어로 ‘야단법석’을 여는 셈이다. 도리사 역시 가을로 접어들면서 많은 가을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유물과 유적

▲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 조선 숙종 때 도리사가 전소되자 새로 금칠을 한 후 산내 암자였던 금당암 본당(지금의 극락전)으로 옮겨졌다.
▲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 조선 숙종 때 도리사가 전소되자 새로 금칠을 한 후 산내 암자였던 금당암 본당(지금의 극락전)으로 옮겨졌다.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는 특이하게 생긴 석탑이 하나 있다. 최근 보수 작업을 마친 도리사 석탑이다. 화엄석탑이라고도 부른다. 보물 제470호로 신라시대 때 만들었다. 높이 4.5m, 기단 높이 1.3m, 기단너비 3m 규모로 화강암이 주 재료다.
쉽게 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양이다. 마치 전탑처럼 흙벽돌을 구워서 쌓은 듯한 이 석탑은 기교는 없지만, 깊은 신앙으로 우직하게 만든 석공의 마음이 깃든 듯하다.
이 탑을 바라보고 앉은 전각이 극락전(문화재자료 제318호,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6호)이다.
당초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 극락전 안의 불상이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314호)이다. 17세기경 나무로 조성한 것으로 여러 차례 개금 불사(금으로 새로 칠함)를 한 사실이 복장유물을 통해 밝혀졌다.
극락전과 화엄석탑 아래 작은 등산길을 따라가면 아도화상의 좌선대와 사적비가 있다. 아도화상이 앉아서 좌선했던 곳으로 너른 바위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쇠잔해 가던 도리사가 최근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세존 사리탑의 발견 때문이다. 극락전 뒤편에 높이 1.3m 남짓의 크기로 세상을 놀라게 한 석종형 부도, 곧 세존사리탑이 있다. 도굴돼 방치됐던 이 탑을 다시 경내로 옮겨와 세우는 과정에서 독특한 모양의 금동 6각 사리함(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사리함, 국보 제208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과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도리사에도 변화가 생겼다. 도리사의 원래 본당은 금당암의 본당인 극락전이었다. 하지만, 세존진신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본당이 적멸보궁으로 바뀐 것.
불교에 있어 존엄의 대상은 경전에서 불상, 진신사리 순으로 높아간다. 사찰 가장 뒤쪽에 자리한 도리사 적멸보궁에는 통상 본당에 있어야 할 불상이나 탱화가 없다. 대신 투명한 유리가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 유리 너머로 세존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다.
도리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적멸보궁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아득하다. 어느 곳 하나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마도 세상을 등지고 ‘나’를 찾고자 했던 고승들의 마음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적멸보궁에서 멀리 세상을 굽어본다. 첩첩 산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길게 이어진다. 어느 때는 바다처럼, 또 어느 때는 파도처럼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오랫동안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선지 낡아 보이는 전각이 초록빛 한결같은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적멸보궁 옆엔 마음을 내려놓고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에 육신의 때를 벗길 수 있는 소나무 숲이 있다. 그곳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백의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이라는 한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의역하면 ‘그대에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니, 단지 웃을 뿐, 대답은 하지 않고 마음만 한가롭구나. 복사꽃을 띄운 물은 아득히 흘러가는데, 이곳이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구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대가 있다. 서대는 산책하던 아도화상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절을 세우면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점지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가 가리킨 곳이 지금의 직지사다. 아마도 아도화상은 이미 세상 막히는 것이 없는 자유인이었던 모양이다.

◆인근 관광지

▲ 도리사 적멸보궁 옆 소나무 숲. 바쁜 일상에 지친 방문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 도리사 적멸보궁 옆 소나무 숲. 바쁜 일상에 지친 방문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도리사를 찾는 이라면 일주문 안팎 식당에서 삼겹살과 진한 향의 미나리 맛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하수로 재배해 청정하고 쌉싸래한 향이 일품이다.
도리사 인근엔 즐길 거리도 많다. 산악자전거와 유유자적 걷기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임도가 있고, 암벽타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냉산 산악 레포츠 공원이 바로 인근에 있다. 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냉산 산림욕장과 선사시대 유적인 낙산리 고분군, 주인을 위해 의롭게 죽은 개를 위로하기 위한 의구총, 임하댐 수몰로 고향을 떠난 전주 류씨 무실파가 고향에서 살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마을을 만든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도 가까이 있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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