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소·양 1천 마리씩 키우며 모례장자네 5년간 머슴살이한 아도…집터·우물 아직 남아있어

<2> 아도, 도개땅에 불교를 전하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곳으로 알려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일원. 현재 신라불교 초전지가 조성돼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는 공식적인 국가사절 등 외교통로를 통해 이뤄졌다. 이에 비해 양국에 둘러싸여 있던 신라는 외교적 고립은 물론, 내부 귀족과 왕족의 갈등 등 지배체제가 정착되지 않아 국가사절을 통한 불교 전래는 늦어졌다.

결국, 법흥왕 8년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에 의해 신라 왕실에 불교가 전해졌다.

불교를 수용한 법흥왕은 이를 장려하려 노력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그러했듯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 불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족과 갈등관계에 있던 귀족의 반대로 국가 차원의 불교 확산은 실패했다. 급기야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신라 백성들은 이미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변방부터 불교가 차츰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 구미(일선)가 있다.

◆구미(선산 또는 일선) 신라 불교의 초전법륜지

우리가 늘 배워온 것처럼, 신라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됐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눌지왕 때 구미(선산 또는 일선)에 불교가 처음 전래됐다는 기록이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이 기록과 오랫동안 한국불교 문화를 연구해 온 정영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학논집 제24편에서 ‘선산을 포함한 구미지역이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 논문에서 “선산(구미) 지역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지로 주목돼 왔다”며 “문헌의 기록과 현지의 전설, 각 지역의 유적ㆍ유물 등을 종합해 신라불교의 초전지역 또는 발상지역으로 심증을 굳혔다”고 밝혔다. 특히 1968년과 1997년 두 차례 이곳에 대한 조사에서 전시대를 통해 많은 불교 유적ㆍ유물이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의 두 번에 걸친 현지 조사와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불교가 구미 도개에 전해지는 과정은 이렇다.

◆고구려 사람 ‘아도’, 구미로 향하다.

지금의 도리사 극락전과 도리사 석탑 인근 소나무 숲에 있는 아도화상 좌선대와 사적비. 집까지 이어진 칡줄기를 따라 냉산에 오른 모례장자가 아도를 만난 곳이다. 뒤로 보이는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 6 년)에 세운 것으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이 적혀있다.
아도화상은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 모례장자네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양 1천 마리와 소 1천 마리를 기르며 5년간 일해 주고 이곳을 떠났는데, 품삯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모례가 섭섭한 마음에 아도가 가는 길을 물으니 어디라고 밝히지는 않고 “얼마 후 칡순이 모례의 집에 내려올 것이니, 그 칡순을 따라오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떠났다.

이후 정월 엄동설한에 칡순이 모례의 집 문턱에 들어오자, 모례는 놀라 그 줄기를 따라 올라가니 그곳에 아도가 있었다. 그가 있던 자리가 바로 도리사 자리다.(현재의 도리사 위치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 도리사는 도리사 부속 암자인 금당암을 새로 지은 것이다.)

아도는 모례장자에게 두 말쯤 들어가는 자그마한 망태기를 주며 시주를 부탁했다. 선뜻 이를 받아들인 모례는 곧 후회를 하게 된다. 두말 쯤 들어갈 정도의 망태기가 몇 섬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례는 망태기를 가득 채우지 못한 채 망태기를 아도에게 되돌려 주었는데, 아도는 이를 종자로 삼아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를 지었다. 그 후 도리사는 번성하고 승려도 크게 늘었다.

하루는 모례가 시주를 나온 탁발승에게 “더욱 부자가 되는 길이 없느냐”고 묻자, 시주는 하지 않고 욕심만 부리는 모례가 미웠던 탁발승은 “이곳 지형이 배 모양이므로 여기는 돛을 세우면 더욱 좋고 부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모례가 이 말을 믿고 석비 셋을 세웠는데,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어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아도가 양과 소 1천 마리씩을 키웠다고 전하는데, 도개면 신림리와 다곡리에 실제로 양천골, 소천골(또 소골, 우실, 쇠골)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있다”며 “마을 한쪽에 모례장자의 집터가 있고, 모례장자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있다”고 말했다.
도개2리 마을 어귀에 있는 석주. 시주에 인색한 모례를 골탕먹일 생각에 도리사 스님이 세울 것을 권유한 석주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례의 집안을 망친 이 입석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라의 미소라고 불릴 만큼 자연스런 미소를 간직한 불상의 모습을 품고 있다.


‘모례정(井)’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인데, 1천600여 년의 내력을 지닌 이 샘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돼 있다. 샘 모양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해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우물 깊이는 3m, 둘레는 단면이 원형이며, 종단면은 가운데가 배가 부르고 상하가 좁다.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들었는데, 그 나무판자가 아직도 썩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정 교수는 “또 마을 어귀에 석주 하나가 있는데, 이 입석이 모례의 집안을 망쳤다는 문제의 석주삼좌 중 하나”라며 이들 지형과 유적, 유물 등이 아도가 구미 도개면에 신라 불교를 처음 전한 흔적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선산 지역을 답사하는 과정에 도리사를 중심으로 한 주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절터를 10여 곳이나 발견해 조사했다”며 “이런 사실을 미뤄보면 신라의 불교는 삼국 중 가장 뒤늦게 공인됐지만, 그 근원은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라고 강조했다.

◆기록에 등장하는 ‘아도’

아도는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고구려 승려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때 묵호자가 일선군에 등장해 고을 사람인 모례가 자기 집에 머물게 했으며, 비천왕 때에는 아도화상이 시중을 드는 사람 3명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나타났는데,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비해 일연의 삼국유사와 각훈의 해동고승전은 아도가 263년 19세에 신라로 들어가 계림 왕성 서쪽에서 생활하며 임금에게 불법 시행을 건의했다가 음해당하자 이를 피해 속림(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지냈으며, 미추왕이 죽은 뒤 아도도 입적하고 다시 불교가 폐하여졌다고 전한다.

기록들을 살펴보면, 묵호자와 아도가 신라에 온 시기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일연은 묵호자와 아도는 동일인물이며, 아도가 일선군에 온 것은 눌지왕 때일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도, 아두, 묵호자 등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승려’를 뜻하는 말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스님을 뜻하는 ‘승(僧)’을 몰라서 ‘아두삼마’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삭발한 중’이라는 뜻으로 당시 신라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불법을 전하는 포교승들이 숨어서 활동했었음을 짐작게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들 기록 모두에서 아도나 묵호자가 당시 신라의 땅인 구미(일선) 모례에 집에서 생활하거나 숨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내용을 같이하고 있다.

◆구미(일선·선산의 옛 고을 이름)를 선택한 이유

모례장자의 집이 있었던 ‘도개’는 신라시대 때 일선군에 속했다. 이는 ‘불도가 열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모례의 집을 중심으로 아도가 신라 땅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개지역은 불교문화의 전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도는 불교 전도를 왜 왕성이 있는 계림(지금의 경주)이 아닌, 일선군 도개에서 시작했을까?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경로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는 내물왕 때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왜국을 물리치고, 실성왕과 눌지왕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선군(지금의 구미)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왕경인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토착신앙과 왕권과 귀족 간 갈등 등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계림(경주)에 비해, 교통상 군사적 요충지인 일선에서 신라 불교가 시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문에 아도가 신라에 주둔했던 고구려 병력을 따라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유물로 본 신라불교 초전지

정영호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구미가 예부터 불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봤다. 금오산 일대에 현존하는 수 개의 사찰은 물론, 산 정상과 산기슭에 20여 개의 폐사지가 있다. 또 아도화상의 이야기와 주륵사 폐사지, 죽장사 오층석탑, 낙산동 삼층석탑 등 찬란했던 불교 유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선지 등에도 신라 불교가 처음 시작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과 현재 전해지는 유물, 유적, 전설 등으로 현재 도개면 도개2리 일대가 신라 불교의 초전지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국보 제182호와 183, 184호로 각각 지정된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과 구미 선산읍 금동관음보살입상 2점은 1976년 도개리와 그다지 멀지 않은 구미시 고아읍에서 사방공사 도중 발견됐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삼국시대 후기 전형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발견 당시 주변에 기와와 토기 조각이 상당수 발견돼 아마도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불교가 국교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때, 불교 신자들이 처음 불교가 전해진 구미(선산, 일선)지역을 순례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신자와 승려들이 찾던 구미(선산)의 불교는 고려를 거치면서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조선시대 들어 영남학파의 근간이 된 성리학의 번성지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면서 급격히 위축된 후 오늘에 이른다.

구미 도개지역이 신라 불교의 초전지로 재조명된 것은 근세 들어서다.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도개가 신라불교 초전지로 우리나라 불교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재조명하면서다.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운동에 앞장선 용성스님은 스승 혜월스님의 유훈에 따라 신라불교 초전지인 도개리를 찾아 수행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수행한 용성 스님은 “신라 불교가 처음 전래된 모례마을을 가꿔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승남 기자 intel887@idaegu.com

자문=권삼문 전 구미시 학예사

사진=한태덕 전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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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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