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찾아가거나 기다리지 말고두서 없어도 종이에 마음을 전하자좋았던 시절 그리며 솔직하면

해마다 가을이 오면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가 하나 있었다. 제목은 늘 ‘으악새 슬피 우니’였고, 인문학 도서 한 권을 읽고 자기감정과 접목시키라고 했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에 최소한 책 한 권을 읽히고 싶었고, 글쓰기 실력을 조금이라도 높여볼까 해서였다.
과제물은 질문과 가벼운 토론을 통해 진위를 가렸다. 엉터리가 몇 명 있었으나 대부분 충실했고, 참 잘한 일 같다. 새내기들 첫 대면에 일성이 “사회과학을 배우는 행정학도들은 쓸 줄도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신문사설을 정독 후 스크랩하고, 글쓰기를 할 때에는 기승전결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모든 시험문제도 ‘∼대하여 논하라’로 출제하였다. 말하기는 토론과 발표를 통해 조금 보탰다.
글쓰기는 무엇보다 어렵고 꺼리는 일이다. 학생들 대부분이 인터넷의 편리함에 이미 빠져버려 편지도 일기도 아예 쓰기 자체를 기피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먼저 자기만의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으면 창의적 발상이 나올 수가 없고, 글을 읽고 쓰지 않고선 결코 양질의 삶을 누릴 수가 없으며, 글 향기가 꽃향기보다도 훨씬 진하다. 다소 힘들어도 글쓰기를 통해 ‘사고의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야 삶에 기쁨을 찾을 수가 있어서다.
요즘은 매일 헬스장에 간다. 근육운동을 하고 자전거를 40분 탄다. 자전거엔 TV모니터가 없어 지루함을 유튜브의 노래를 들으면서 타다 보니 대중가요에 도사(道士)가 되어간다. 다 애절한 트로트다. 들을 때마다 노랫말의 기막힘에 놀란다.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저렇게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참 대단한 기술이다. 누구나 노래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빠져든다. 마지막 편지(조영남). 자옥아(박상철), 미스고(이태호), 옛날 애인(전부성) 등등을 섭렵했다. 최근엔 어니언스의 ‘편지’를 자주 듣는다. 지난날의 아련한 추억 하나가 자꾸만 떠올라서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
하이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간 /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 보낸다“
45년이 흐른 노래인데도 들을수록 짠하고 아름답다. 노래 속 화자(話者)는 ‘차가운 손’과 ‘눈물 젖은 편지’며, 서러움과 사랑이 듣는 이마다 다르게 잠긴다. 썸만 타다 끝난 사랑인지, 아픈 이별을 경험한 사랑인지, 짝사랑인지는 몰라도 이 세상 모든 이의 연정(戀情) 같다. 필자는 본보(지난해 10월11일)에 ‘가을엔 그리운 사람과 추억을 만나자’는 칼럼을 게재하였다. 지인들로부터 ‘감성교수’라는 별칭도 얻었다.
가을엔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기다리지만 말고 찾아가서라도 만나라고 했다. 만나거든 부담도 떠난 이유도 묻지 말고 화해를 위한 좋은 말만 하고 기다리자. 세월이 흘러 이미 사랑이 식었거나 변했어도 아쉬워하지 말고 그러려니 해야 하며, 혹 돌아오는 길이 힘들고 아파도 미련에 떨지 말고 참아야 한다”고 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또 가을이 소리 없이 깊어만 간다.
올해는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지도 배회하지도 기다리지도 말자. 차라리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편지를 쓰자. 종이편지가 가장 좋고 이메일은 그다음이고 문자나 카톡은 피하자. 연서(戀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글 솜씨가 서툴러도 두서가 없어도 좋다. 그냥 좋았던 시절을 그리며 솔직하면 되고, 풍문에 전해 들은 말이나 행복기원을 보태도 된다. 가급적 그리움이 밀려올 때 쓰고 꼭 점검해야 한다. 혹 취한 나머지 그냥 부쳐버리면 낭패다.
하늘나라에 띄우는 편지 말고는 가급적 붉은 우체통에 묻자. 추억과 그리움만 짙으면 이별과 잊음도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 그래야 ‘내면의 성숙’으로 춥고 긴 겨울, 꽃피는 새봄, 또 내년 가을이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올가을엔 설령 부치지 못할 편지일지라도 상상(想像)에 흠뻑 젖어보는 계절이었으면 한다. 가을이 가고 있네.

이상섭

연변과학기술대 겸직교수

전 경북도립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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