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동화나라를 만든 의성 ‘사촌은행나무숲’

▲ 잘 익어 수북이 떨어진 은행열매. 완전히 익으면 저절로 떨어진다.
▲ 잘 익어 수북이 떨어진 은행열매. 완전히 익으면 저절로 떨어진다.

은행나무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1천100년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정3품 벼슬을 받았다. 심고 나서 20년이 넘어야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손자가 열매를 딴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 은행 열매가 달리듯 학자가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면서 집 앞에 심어 ‘학자수(學者樹)’라고 했다. 경칩 날에는 은행열매를 연인에게 보내 사랑을 확인했다고 하니, 조선시대의 ‘밸런타인데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성군 점곡면에서 1만6천500㎡의 밭에 1천여 그루의 은행나무를 가꾼 강소농이 있다. 그 주인공은 ‘사촌은행나무숲’ 박정현(55) 대표다. 박 대표는 16년 전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은행나무를 심고 가꾸는 고집 센 농부다. 그동안 숨겨 놓았던 비밀의 정원을 오는 19일 은행나무숲 체험행사를 시작으로 세상에 개방한다.

◆고집과 인내의 농사꾼

박 대표는 영농경력 16년차의 중견 농사꾼이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공부하고 도시에서 23년간 영어전문학원을 운영하면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친 잘 나가는 학원장 겸 강사였다. 잘 가르친다는 소문에 항상 수강생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대학입시 경향이 바뀌면서 상황이 확 변했다. 학생들이 전 과목 성적관리를 위해 종합반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면서 국ㆍ영ㆍ수 중심의 단과반 학원은 수강생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박 대표는 결국 학원운영을 접고 귀향해 아버지가 경작하던 사과농장을 물려받았다.
몇 년후 사과나무를 캐내고 은행나무를 심었다. 한 해에 몇천만 원의 소득이 나오던 사과농사를 포기하고 은행나무를 심자 주변에서는 모두 ‘미쳤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도시생활에서 실패한 충격 때문일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주렁주렁 달린 은행열매와 동화나라 같은 조형물을 보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한다. 지난해 박 대표는 은행열매를 판매해 3천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올해는 15t 정도의 열매를 생산해 4천만 원이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은행을 이용한 체험활동도 준비 중이다.

◆왜 은행나무인가?

박 대표가 사과농사를 포기하고 은행나무를 선택할 때 많은 고민을 했다. 농촌에서 할 수 있는 ‘노후안정대책’을 생각하다가 은행나무를 선택했다. 은행은 장수목이면서 관리가 쉽다는 생각에서다. 한번 심으면 3대, 4대가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나무라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연금을 넣는다는 생각으로 은행나무를 선택했다.
박 대표의 이런 생각에 확신을 준 것은 제주도 여행 중에 들린 ‘석부작박물관’이었다. 돌과 나무와 야생화, 방갈로가 어우러진 관광명소를 본 후 ‘나도 저런 명소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때부터 은행나무를 가꾸면서 돌탑을 쌓고 전망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은행열매 생산이 시작되면서 가공사업도 준비 중이다. 은행국수를 비롯해 은행진액, 은행 된장ㆍ고추장ㆍ음료수 등의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은행나무

▲ 사촌은행나무숲의 굵은 은행열매(왼쪽)와 일반 은행열매. 일반 은행열매보다 3~4배 더 크다.
▲ 사촌은행나무숲의 굵은 은행열매(왼쪽)와 일반 은행열매. 일반 은행열매보다 3~4배 더 크다.

은행나무는 대표적인 장수목(長壽木) 이면서 버릴 것이 없다. 수령 천 년을 넘긴 나무도 많다. 혈액순환 개선과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또한 폐를 튼튼하게 만들어 거담작용(가래제거)을 해 천식치료 효과도 있다고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장점이 많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 재배하기가 쉽고 수명이 길어 몇 대에 걸쳐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잎은 약제로, 열매는 식용, 나무는 성장속도가 빠르고 뒤틀림 현상이 없어 고급 가구나 공예품의 재료로 널리 쓰인다. 공해물질 정화능력으로 가로수로도 사랑받고 있다.
‘사촌은행나무숲’에는 1천여 그루 중에서 밤톨만 한 큰 열매가 열리는 특별한 나무가 있어 접목과 꺾꽂이를 통해 증식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반 은행 알보다 3∼4배 커서 증식이 이루어지면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동화나라를 만들다.

▲ 박정현 대표(왼쪽)가 오랜 친구인 배영식 시인과 함께 조형물과 농장운영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박정현 대표(왼쪽)가 오랜 친구인 배영식 시인과 함께 조형물과 농장운영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은 박 대표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농장 곳곳에는 동화나라에서나 있을 것 같은 오색의 성벽과 전망대, 풍차, 배, 구름다리를 비롯한 많은 철재 조형물과 11개의 돌탑이 있다. 이것을 만드는데 꼬박 8년이 걸렸다. 철재 조형물들은 수시로 고물상을 뒤져서 구해 온 재활용자재다. 설계와 용접, 도색 등 모든 작업을 혼자 했다. 돌탑을 쌓는데 경운기 500여 대 분량의 돌이 들어갔다.
건축이나 토목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복잡한 구조물을 설계하고 시공을 하느냐고 묻자 “매일 저녁에 농장 옆에 흐르는 ‘미천’ 둑을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설계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몰입하다 보니 산책하다가 하천 둑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용접작업 도중 3번이나 감전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사계절 농산물 종합체험장 조성

전통과 현대의 놀이, 농산물이 어우러지는 종합체험장을 만드는 것이 박 대표의 꿈이다. 자신이 가꾼 은행나무숲과 사촌마을의 문화유산, 인근의 과수원을 연계한 종합놀이와 체험을 겸한 농산물 판매장이다. 도시인들에게 농촌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잠시라도 휴식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농산물 판매를 통해 농가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평생 수집해 온 수많은 골동품을 이용한 생활박물관을 만들어 전통문화를 보존하면서 시대의 변화상을 보여줄 계획이다.
오는 19일부터 23일까지 실시하는 사촌은행나무숲 체험행사에 참여하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숲길을 걷는 멋과 은행열매를 구워 먹는 특별한 추억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농장명: 사촌은행나무숲
▲농장주: 박정현 (2013 강소농)
▲구입ㆍ체험문의: 010-4300-8677, 054-833-1229
▲소재지: 의성군 점곡면 중리들길 14-30
▲이메일: bys3705@naver.com

글ㆍ사진 홍상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경북도농업기술원 강소농 민간전문위원
팜라이터. ilsok@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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