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탐스럽게 빛난다. 시골집 마당에 가득 피어 여름을 즐겁게 해주었던 수국의 잎사귀가 울긋불긋 물들었다. 호박은 어느새 옆집 담을 넘어 감나무까지 뻗어 올라가 누런 호박덩이를 덩그러니 공중에 매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가을의 풍경에 걸맞게 모진 비바람에도 제소임을 다했다며 한껏 자랑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야외테이블을 꺼내놓자 지인이 찾아왔다. 얼른 차 한잔하자며 자리를 권하였다. 모두가 바쁘게 생활하다가 쉬는 날 짬짬이 들러 잠시 머무르는 주말 집이기에 속속들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목소리만 들려와도 참으로 반가운 그였다. 주말에 찾아와 잡초를 뽑거나 밭의 채소를 만지다가 어두워지면 내려가곤 하지만, 그래도 그 몇 시간이 얼마나 마음에 위안을 주던가. 그것을 알기에 이곳을 드나드는 분들은 입주해 살지 않더라도 각자에게는 정말 힐링의 공간인 셈이리라.
나의 지인은 찻잔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더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며 이야기 한 자락을 꺼낸다. 잊지 못할 선생님께서 연휴 기간에 타계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마을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부지런히 걸어다니셨고 또 마을 축제 때만 하여도 건강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시며 무대에도 올라가시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며 한 말씀 하셨다던 그 선생님, 여학교 때 만났던 나의 담임 선생님을 연상시키던 모습이라 더 기억에 남는 분이었다. 한창 활동하실 연세에 갑작스럽게 큰 병을 얻었다고 한다. 치료를 시작하였지만 더는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갔다. 그러자 담담하게 생을 정리하고 계신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먼 곳으로 떠날 줄을 몰랐는데 갑작스럽게 떠나버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나도 가슴이 먹먹해 왔다.
“비가 오면 한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고 서둘러야 해!” 나의 은사님은 비 오는 날만 되면 지각하는 제자들을 모아놓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훈계하곤 하셨다. 학교 다닐 때는 담임 선생님의 그 말씀이 그냥 잔소리로만 들렸는데 살아갈수록 정말이지 비 오는 날만 되면 그 음성이 귓전에 쟁쟁 들려온다. 음성지원이라도 하시는 듯 학교 때 은사님의 음성이 자꾸만 들려온다. 그 시절 쉬지 않고 하시던 그 말씀이 그냥 ‘잔소리’가 아니라 ‘잔잔한 사랑의 소리’였던 것일까. 비가 잦고 바람이 많이 부는 요즈음 같은 때면 유난히 선생님 생각이 자주 나곤 한다. 나의 은사님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셨다. 검정고시로 교육계에 들어와 피나는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공부에는 때가 있고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도 조언이 꼭 필요하다고 하시며 늘 내게 선생님의 뒤를 잇기를 원하셨다.
고3 시험이 끝나자 선생님은 봉급을 털어 입시학원에 등록까지 해두셨다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사범대학에 들어가서 정말 한없이 공부 한번 해보라고 내게 권하셨다. 의사는 늘 아픈 이들을 돌보아야 해서 심신이 매우 고달플 것이라면서 마음 아파하셨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야 나라의 기둥인 제자를 크게 가르칠 수 있다며 강조하셨다. 선생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옆길을 걸어가 말 안 듣는 제자로 남았지만, 선생님은 그 이후에도 끝없이 나의 뒤를 살펴봐 주시곤 하셨다. 결혼할 때에도,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도, 친부모처럼 기뻐해 주시고 챙겨주시더니 어느 날 주무시는 잠에 하늘로 가셨단다. 해가 바뀌고 소식이 뜸하기에 안부가 궁금하여 전화를 넣었다가 그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뒤늦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무심함에 가슴을 쳐야만 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선한 웃음을 머금으시며 비 오는 날이면 또 음성지원을 하시리라. “얼른 서둘러라. 한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야 지각하지 않는다. 쉼 없이 나아가거라. 오르막도 있을 것이고 내리막도 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라고 하실 것이다. 문득 영화 ‘어바웃 타임’이 떠오른다. 인생은 두 번 되풀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의 반복으로 완벽한 순간까지 선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있다 하여도 생과 사를 번복할 수는 없다. 생은 단 한 번의 순간으로 결정되지 않던가. 아무리 간절히 바라더라도 죽음은 이어진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 한들 인생은 한 번뿐이지 않은가. 오늘 하루.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완전 즐겁게, 진짜 기쁘게,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우리는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를 항상 시간 여행하는 것일 터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이 멋진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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