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한 그루 거느려도 저리 슬프지 않을 것을/ 조밭머리 흐느적대는 눈 먼 바람만이/ 학소대 갇힌 물소리를 진양조로 풀었다.// 세월의 뒤안에서는 석탑마저 안거(安居)에 드나/ 법당 안 딛은 발을 내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말없이 청산을 넘는 구름법문(法問)을 듣는다.// 유사(遺事)의 어느 상류, 희미하게 떠돌다 가는/ 큰스님 발자국 곁에 젖은 신발을 벗으면/ 뿔 고운 기린 한 마리 장경(長徑) 속을 걸어 나오고.

- 시조집『풀잎』(동학사,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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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단군기원 4천351년이다. 정부 수립 후 한동안 국가 연호로 단군기원을 썼으나 5ㆍ16 군사정변 후 서기를 공용 연호로 쓰기 시작했다. 단군 조선을 인정치 않으려는 분위기가 사학계에 확산되면서 단군의 존재는 일반의 의식에서도 차츰 옅어져 갔다. 하지만 단군의 존재와 단군 조선은 우리 한민족 역사 속에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건국신화를 최초로 기록한 서책이 ‘삼국유사’이고, 군위 인각사는 일연이 민족의 위대한 기록문화유산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곳이다. 편찬은 청도 운문사 주지로 계실 때였고 탈고는 비슬산 용천사에서 했으리라 추정된다.
시인은 큰 스님이 온 힘을 쏟아 부은 절터에서 세 수의 시조로 그 감회에 젖어들었다. 일연이 유사를 저술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40여 년간 긴 몽골과의 전쟁으로 엄청난 역사 유물이 소실되고, 고려인의 민족적 자긍심이 상처받고 중심을 잃은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속세를 떠난 신분이었지만 민족적 자존심을 잃어가던 민중들에게 호국사상과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자 저술을 결심했던 것이다. 집필은 70대 후반부터 8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루어져 실로 어마어마한 노익장이었다.
사찰 뒤편 산줄기가 전설 속 동물인 기린의 뿔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인각(麟角)이라 이름 지어진 사찰 앞에는 수많은 백학이 살아 이름 붙여진 학소대가 있다. ‘진양조’로 풀려 흐르는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퇴락하여 거의 폐사가 되다시피 했는데, 특히 인각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심하게 훼손됐다.
그런 처지의 인각사는 사실 이렇다 할 볼거리도, 변변한 소나무 한 그루도 없는 초라한 사찰에 불과하다. 수년 전 절 구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어 지금은 면모가 달라졌으리라 짐작된다. 어쨌거나 인각사에 얽힌 관심은 역시 삼국유사다. 조선시대 내내 허황한 야사라며 성리학에 가려 홀대를 받다가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임란 때 약탈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도쿠가와에 의해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후였다. 도쿠가와가 아니었으면 그 위상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삼국유사가 아니었으면 숱한 그 감동의 스토리를 어찌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교육의 이념이 과연 존재할 수나 있었을까. 결국 세월이 흘러 뒤에 남는 것은 세상을 벌벌 떨게 한 권력도, 화려하고 장엄한 사찰 건물도 아니었다.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가 없듯이 우리는 단군조선과 삼국유사의 가치를 확장시켜 후세에 전달할 책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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