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울진 매화마을

윤광수 가옥은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었던 윤촌마을(매화리) 초입에 자리 잡고 있다.
1750년경 건립된것으로 추정되며 1960년경 중수하였다.
이 집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뜰집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연이어져 □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 가옥은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부분적으로 개조되기는 하였으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쪽마루를 부설한 뜰집형으로 생활의 변화에 따른 한옥의 공간 변용과정을 살필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의미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매화 마을이라지만 철이 아니어서 매화는 없고 꽃이 없으니 매화향도 없었다.
옛날 도도했던 양반마을의 기품은 마을 입구 길 양편에 휘날리는 석회광산 반대 깃발로 오히려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마을 뒤 남수산 정상의 거대한 싱크홀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원전 건설이 일시 중단되면서 군 전체 분위기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지역민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멀리 현종산 정상에는 수많은 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고 있다.

경북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포항에서 울진으로 달리다가 덕신네거리에서 성류굴 못미처 왼쪽으로 남수산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동해안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남수산은 일월산의 지맥으로 조선조 예언가 격암 남사고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었다.
남사고는 풍수가로서 민간에 많은 설화와 전설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도 가뭄이 심할 때면 남수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올려 지역민의 마음을 전하는 곳이다.

매화마을. 마을에 매화가 많았다고도 했고 그래서 예부터 고을 이름에 매화의 매(梅)자가 들어간 곳이 많았다.

남수산 부근이 매화꽃을 닮았다는 이야기나 산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매화꽃을 닮았다는 말은 산을 올라보지 않았어도 이곳이 풍수상 매화낙지(梅花落地)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매화면은 2015년 4월까지 원남면으로 불렸다.
울진군청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곳은 근남이고 멀리 떨어졌다고 원남면이라 했으나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매화면으로 바꿨다.
당시 주민들은 매화와 매실로 유명한 고을 이름으로 원남면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름을 매화면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면에서는 지역별로 넓은 매화 동산을 가꾸고 가로수를 매화로 심는 등 매화 이름값을 하는데도 열성이다.

매화리는 해발 437m의 남수산 아래 왕피천 상류 매화천을 사이에 두고 2리와 1리가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있다.
2리에는 성씨에 따라 파평윤씨의 윤촌, 강릉최씨의 최촌, 영양남씨의 남촌, 담양전씨의 전촌 등으로 집성촌이 구성돼 있는데 이들 외에도 신안주씨와 평산신씨 등이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도 어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대부분 떠나고 노인들이 남아 있다.


◆비굴하지 않은 삶의 향기 후세에 남아

진군 매화면 이현세만화거리.

이현세 만화거리의 벽화 앞으로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마을 한복판에는 수백 년 된 회화나무와 팽나무가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돼 있다.
옛날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제를 지내기도 했고 마을 우물이 있었던 곳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매화 마을의 중요 기능들이 모두 매화 2리에 있었으나 하나씩 허물어지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정자 앞쪽이 구 장터였다.
이장 장영철씨는 “일제강점기 매화장으로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양반 동네에 백정과 기생들이 들어와 마을 기풍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 당시 마을 어른들의 장터 이전 이유였다고 증언한다.
이런 마을의 기풍이 오늘에 와서 행정단위인 면의 이름을 원남에서 매화로 바꾸게 만든 저력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형성되던 장터가 매화1리로 옮겨가면서 면의 중심도 매화천 건너 매화 1리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장터가 있던 자리는 논밭으로 변했고 면사무소도 매화 1리에 자리 잡았다.
매화1리는 최근 만화가 이현세의 만화들로 벽화거리가 형성돼 전국적으로 새로운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고가옥들이 많았으나 최근 들면서 증ㆍ개축과 함께 전통 가옥이 상당수 사라졌다고 마을 주민들은 말한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윤광수 가옥은 그 매화2리 윤촌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뜰집으로 크지 않은 ‘ㅁ’ 자형 골기와집이다.
안동이나 경주의 번듯한 대가집 위세와는 다른, 소박하면서도 검소한 선비의 단아함이 풍겨 나오는 집이다.
가운데 뜰이 3평 정도 좁은, 따라서 하늘도 3평 정도로 뚫려 있다.
집 밖에서 보면 사랑채가 길게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뜰 안에서는 안채와 부엌, 대청마루 등이 이어져 있다.
크지 않은 규모에 화려하지 않은 건축이지만 동해안 지역의 중요한 건축 문화 자료로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조선 영조때인 1750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동안 여러차례 고쳐 지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10여 년 전 서 있던 앞마당 커다란 감나무도 베어졌고 정감있는 옛 돌담에 옛 골기와였으나 담장과 마루 등 곳곳을 현대식으로 손질했다.
들어서는 대문격인 정지문과 대청마루 쪽문, 앞쪽 남향 사랑채의 쪽마루와 난간 기둥이 예사롭지 않았을 옛 주인의 품위를 가늠케 한다.

동해안 한적한 바닷가 마을, 그곳에 터잡은 양반 가문들의 겸허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자연과 순응해 살았던 모습을 매화마을에서 느낄 수 있었다.
대대로 이어온 성씨들이 서로 안으로 경쟁하고 밖으로 화합하면서 각기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이다.

윤광수 가옥은 그의 4대조 괴은공 윤상일(1849~1907)이 고쳐 거주했을 것으로 후손들은 추측한다.
이 집의 현판에 윤상일의 호 괴은을 흠모하는 ‘모은태장’에서부터 집의 건축연대와 그의 생몰 연대를 유추해서 나온 결론이다.
윤상일은 구한말 교수를 역임했고 행적이 유학자로 독립운동가 향산 이만도와 학봉 김성일의 종손 김흥락 등과 교유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문집과 비문 등에 남아 있다.

마을 이름이나 장터를 옮겨가게 만든 이곳 집성촌 지역민들의 자존심과 특히 파평윤씨 일문 일문의 행적은 이웃한 금매리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에서 확인된다.

효종 때 극심한 한해로 굶어 죽는 백성이 생겨나자 이 고을 출신의 우암 윤시형이 임금의 부덕함과 정치 잘못을 상소한다.

효종은 “초야에 묻힌 선비가 나라 사랑과 충성심에 심히 기뻐하며 마땅히 정치 폐단을 논의해 처리하리라”는 비답을 내린다.
우암은 문장으로 동료 선비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말년에는 몽천에서 유생들을 모아 강독했던 선비였다.

그 뒤 숙종 때 우암의 맏아들 삼족당 윤여룡이 정치의 부패상과 민생고를 열거하고 광정책을 상소해 왕으로부터 “적절한 건의에 기쁘고 고맙다”는 비답을 받는다.

정조 때는 우암의 증손 황림 윤사진이 정관치설을 상소해서 비답을 받았다.
황림은 정조 때 성리설 주역 등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정조로부터 “벽지에 이처럼 학행이 높고 독실한 선비가 있으니 기쁘다”며 ‘조봉대부특수영동교양관’으로 임명했다고 그의 신도비에 새겼다.

이 윤씨 3대가 3대의 왕으로부터 받은 비답을 소장한 곳이 ‘삼조어비각’이다.
이 자리에는 광해군 때 몽천사가 있었으나 윤사진은 그 자리에 몽천서당을 지어 울진의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가 돌아가신 후 지역민들이 몽천서원을 세우고 윤씨 3대의 위패를 모셨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3조의 비답과 위패는 삼조어비각에 소장됐다.
비각이 세워진 자리의 몽천은 물이 줄거나 불어나는 일도 없고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해 명승지로 꼽히고 있는 곳이다.


◆구국과 교육의 요람지

매화리는 울진의 교육 요람이기도 하고 항일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매화2리 마을에 있던 만흥학교도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
울진 출신 독립운동가인 백운 주진수는 교육 구국의 뜻을 품고 1907년 지역 유지들과 함께 이곳에 울진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만흥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신교육과 함께 애국 계몽가들을 초빙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이 만흥학교 출신들임을 알게 된 일제가 학교를 폐쇄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학교가 있던 자리가 마을 중심의 팽나무가 지키고 있는 자리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어떤 표지석도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일제가 깡그리 없애버렸다.

또 1939년에는 울진 최초의 공립농민학교가 매화2리에 설립됐으나 44년 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폐쇄되고 울진공립여자실천학교로 되었다가 합병과 폐교를 반복했다.
지금 해군부대가 설립돼 있는 자리가 고등학교 자리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3ㆍ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 영향을 받아 같은 해 4월 울진 매화장터와 북면 부구리 흥부장터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매화에서는 4월10일 밤 남수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걸어놓으면서 만세운동은 시작됐다.
매화장날인 11일을 받아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만흥학교 학생들과 청년 유림 등 주민 5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일본군들에게 쫓기면서 부구리까지 산길 20km를 내달렸고 이튿날 흥부장의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윤현수씨는 전한다.
당시 어른들로부터 “기다란 장대에 태극기를 매달아 마을 뒤 남수산 꼭대기에서 흔들어 지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때 검거된 사람들이 대부분 울진 매화의 만흥학교 출신들이었고 그것이 만흥학교가 폐교된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 있는 울진기미독립만세기념탑.

지금 매화면 매화1리 매화동산에 당시의 감동적 현장과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울진기미만세기념탑이 남수산을 바라며 우뚝 서 있다.
기념비에는 3·1운동지사로 매화 출신에 독립운동가 13명과 500여 인, 흥부 출신에 11명과 1천여 인 등이 참여했다고 적고 있다.
매화에서는 3ㆍ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만도 20여 명에 이른다.



매화리에서 금수산을 한 바퀴 돌아 반대쪽 근남면 왕피천 상류 계곡에 윤상일이 형 윤건일을 위해 지었다는 청암정이 있었으나 부서지고 지금은 새로 지은 청암정이 새로 들어섰다고 해서 찾았으나 입구 주변을 둘러막아 찾을 수 없었다.
더 깊은 계곡 끝에 구산리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이 모양을 갖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행한 주민 김임동씨(70)는 “해체돼 흩어진 돌무더기를 1968년 탑으로 형체를 복원해 보물 498호로 지정 되었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금동 불상과 명문 기와 등이 발굴되었으며 청암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우리의 옛 생활 자취와 문화유적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에서 지금은 우리 것을 보전하고 그 의미를 새기려는 노력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기쁨이다.

이경우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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