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이스차카란 작은 섬에서 열리는 ‘국제 극한미생물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켰다. 교수라면 누구나 반드시 국제학회에서 최신의 연구 결과를 교류해야 한다. 아까운 세금으로 마련된 연구비를 이미 유행이 지나가버린 연구에 소진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도, 스마트폰 업데이트 주기처럼 변화가 빨라진 수업 내용을 최신형으로 업데이트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요즘엔 국제학회의 연사 목록에 국적을 표시하는 것이 유행이다. 내 이름 뒤에 달린 ‘KOR’이 외롭게 CHI나 JAN 마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페이지에 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 우리나라 학자들의 국제학회 참석은 정말 적구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연구발표 때나 리셉션 때 일부러 좀 더 과장된 언어와 몸짓으로 발표, 질문, 의견 교환을 활발히 하는 편이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한국인 과학자도 있다는 존재감을 기어이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결코 영어를 잘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 오해 마시라. 내가 말하는 문장을 누가 녹음해서 글로 풀어놓으면 여지없이 문법 파괴 수준일 것이다. 그래도 ‘당신들이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니 어쩌겠나?’란 생각으로 열심히 단어를 주워 모으면, 다들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내가 자기들 앞에서 침을 튀기며 열심히 떠드니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언젠가 학생들에게 나는 강의실로 들어올 때 매번 긴장된다고 했더니 전부 “에이…” 하며 못 믿는 눈치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잘 떠들고, 당당하고, 낯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단다. 기가 막혔다. 내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많은 사람 앞에서 혼자 떠들어야 하는데 긴장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
나의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은 성격이 아주 괄괄한 장부 스타일의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학기 초에 우리 집으로 가정방문을 온 자리에서 출근을 미룬 어머니가 내놓은 보리차를 한 잔 들이켜고는 다짜고짜 어머니에게 혹시 계모인지를 물었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시며 틀림없이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밝히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느냐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이고 늘 주눅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틀림없이 계모 밑에서 크는 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에피소드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나는 혼자 논 기억밖에 없다. 학교 마치면 바로 집으로 와서 혼자 공상하고 뭘 만들고 부수고 하던 것이 일과였다. 어쩌면 상대적인 가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굶은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모두 가지고 있던 ‘전자완구 제미니’를 나는 끝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소리지만, 교수가 되고 나서 제일 좋았던 것이, 주머니에 달랑 차비만 가지고 화려한 백화점 매장에 들어가도 움츠러들거나 겁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난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사람을 위축되고 못살게 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정방문일에 어머니는, 새벽에 3교대 근무에서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잠을 못 이루신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에 늘 풍국주정에 함께 다니시던 옆집 아주머니께 오늘도 몸이 아파 못 나간다고 했다. 그 소리를 문틈으로 듣고는 방과 후에 집에 오면 엄마가 있으리라 생각하니, 등굣길이 즐거웠다.
다음 주였나? 어머니는 향촌동 대보백화점에 나를 데리고 가서 보이스카우트 옷이랑 항건이랑 호루라기 등을 사 주셨다. 모두 6만 원이었다. 아버지 월급이 10만 원을 넘었다고 좋아하시던 게 몇 달 전이었고, 사춘기 중학생 누나가 3년 내내 단벌로 여기저기 기워 입고 다니면서 새로 사 달라고 칭얼대던 교복값이 9천 원이었으니,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 초등학생 생각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옷은, 늘 행동에 자신감이 넘치고 선생님들이 잘 봐주는 애들인 보이스카우트에 소속되는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왜 그런 큰돈을 나에게 쓰는지는 충분히 알았던 것 같다. 그 뒤로는 어디 가서도 일부러 앞자리를 찾아서 앉고, 질문 생각만으로도 귀에서 쿵쾅거리며 들리는 심장을 애써 짓누르고, 어지러움까지 느끼며 질문을 했다. 정말 기를 쓰고 질문을 하고, 발표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마음먹고 몇 년을 악착같이 그렇게 살았다.
가족에게 정말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으며, 충격이었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소심하고 숫기없이 내성적이었던 아들은, 이제는 세계 곳곳에 반가이 맞이하는 얼굴들이 생긴 국제적 ‘인싸’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불려다니고 있다. 이게 다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일탈 덕분이었다.

신재호

경북대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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