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을 나서니 쌀쌀한 기운이 전해진다. 하늘은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문득 그리움이 밀려든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과 은은한 달빛이 그리움을 더한다. 생의 한 부분을 빛나게 해주었던 이들의 사랑이 느껴진다.
일이 있어 비행기를 타고 지구의 반을 돌아야 했다. 경유 시간이 길어 거의 하루가 걸려 새벽에서야 호텔에 도착하였다. 잠시 나갔다가 오려고 방문을 닫는 순간, 아뿔싸! 열쇠를 들고 나오지 않은 것이 머리를 스쳤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기나 하겠어? 하는 생각으로 일을 마치고 올라가니 조용하다. 아무리 호텔 방문을 두드려도 감감무소식이다. 조심스레 노크를 계속해보아도 답이 없다. 옆방의 문이 열린다. 나는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니 덩치 큰 남자가 눈을 찡긋하며 엄지를 척 올린다. 그러더니 손을 뺨에 대면서 아마도 자는 모양인 것 같다는 시늉을 해대며 “계속 더 크게 노크를 하는 것이 베스트!”라며 귀띔해주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도 들고 오지 않았으니 전화할 수도 없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이번엔 마스터키를 요청해보아야 할 것 같다며 자기도 같이 가주겠단다. 깊은 밤에 선뜻 동행해주는 그에게서 두려움보다는 배려심이 느껴진다. 만능열쇠로 열고 들어가니 물소리가 요란하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라 샤워라도 하면 개운할까 싶어서 욕실로 들어간 모양이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룸메이트의 모습에서도 배려가 잔뜩 묻어 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배려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화내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던 이웃과 방 친구처럼. 배려하는 마음이 곧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배려는 당장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지도 모르겠다. 잠시 흐렸던 날씨가 다시 좋아지고 있다. 파란 하늘은 맑고 써늘한 산들바람이 분다. 마치 어린 시절 소풍 갔던 날처럼 쾌청하다.
여행을 갈 때면 늘 가방 안에 넣어서 다니는 빛바랜 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 장인은 20세의 나이에 극도로 악화한 고혈압 때문에 앞으로 몇 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운이 좋았다. 그 후 해를 거듭함에 따라 고혈압을 위한 신약들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70이 넘은 고령인데도 그분은 아직도 살아계실 뿐 아니라 아주 정정하시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결혼을 해 자식들을 낳았으며, 열성적인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 장인께서는 캠핑용 자동차로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으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여러 가지 운동을 즐기셨다. 또 친척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전 세계에 있는 친구들과도 가까운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장인은 동년배 사람들보다 한결 더 보람찬 삶을 즐기셨다.”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슬픔이나 분노 따위의 갖가지 감정을 거의 매일같이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의 타고난 성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삶을 즐기고 대부분 시간을 행복하게 느낄 줄 아는 자세를 목표 삼아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시간이라 한 것은 누구도 삶의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삶이다. 행복은 그것을 목표 삼아 노력해야 한다. 또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씨가 필요한 것이다. 진정 불행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 일상생활에 기본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는 걸 깨우치게 도울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가며 살아야 한다.
글쓴이는 인생이 행복해지는 25가지 방법을 가르쳐준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보라. 기차가 떠나버렸을 때, 차를 끼워주지 않을 때 무시해버려라. 꼭 해야만 하는 불쾌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거든 애써 하도록 하라. 사랑하는 배우자나 가족 또는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 얼굴에 늘 미소를 지어라. 무엇이든 앞날이 기다려지는 일을 하라. 다른 사람의 하루를 즐겁게 만들라.’
행복은 어쩌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깊어간다. 맑고 푸른 햇볕 아래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행복을 마음껏 벌어보자.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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