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을의 위치에서 갑의 위치로 격상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7월 평양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북한 외무성은 다짜고짜로 “미국은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나왔다”고 욕설 같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국은 그 이후 슬그머니 FFVD(최종적이고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핵폐기)로 대체했다. CVID가 어떤 것인가. 2002년 부시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북한에 대한 비핵화 개념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6자회담 회원국 중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이 공식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런 목표를 북한의 욕지거리 한마디로 대국인 미국이 체면도 없이 슬그머니 내려버리다니…. 중간 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북한 핵문제 해결 실패라는 딱지를 뒤집어쓸까 봐 겁나는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정상이 직접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당연하고도 적절한 말을 했다. 그런데 이를 받아 북한 노동신문은 ‘쓸데없는 훈시질’이라고 비난했다.
이 말을 의식해서일까. 아니면 ‘남북관계가 틀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 때문일까? 어떻든 이후 문 대통령의 발언은 한쪽으로 기운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예의 하나가 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이나 유엔총회 연설 등 미국에서의 활동을 종합평가하면서 낸 블룸버그통신의 결론이다. 즉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서 김정은 수석대변인이 됐다’는 혹평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는 미국 보수정치계의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문 대통령은 미국서 ‘북한의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보여줬으니 이제는 국제사회가 화답할 차례’라는 UN 연설도 했고, ‘종전선언은 미국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다’느니 ‘정치적 선언이므로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의 (비핵화)약속을 어길 경우 제재를 다시 강화하면 그만’이라는 폭스뉴스 인터뷰나 미국외교협회에서의 연설도 있었다.
이외도 ‘김정은은 경제발전을 위해선 얼마든지 핵을 포기할 수 있는 진정성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든지 ‘동창리 미사일발사장 폐기는 북한이 다시는 핵과 미사일 도발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라는 발언도 보수권의 여론을 건드린 듯하다. 왜냐하면 동창리 미사일발사대를 없애도 이동식발사대로 얼마든지 실험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교문제에 ‘김정은의 진정성’이라는 말 한마디로 담보하니 그런 것 같다.
어떻든 갑자기 북한은 한국과 미국에 대해 세졌다. 그 예의 하나가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유엔 일반토의 연설과 태형철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겸 고등교육상의 평화포럼 기조연설(참사관이 대독)서 나온 내용이다. 한마디로 ‘종선선언과 평화협정이 한반도 비핵화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먼저 비핵화를 위한 비단길을 깔아 놓으면 가겠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1월 북한에 대한 유엔의 제재가 극심할 때 김정은 위원장이 대화를 제의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우리가 갑이고 북이 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는 우리와 미국의 여론은 일괄타결에 의견일치를 봤었다. 단계적, 동시적 해결은 8번이나 속아온 방식이어서 안 된다는 약간은 배짱을 부린다고도 볼 수 있는 여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렇게 갑자기 바뀌어 버린 것이다. 분명 남북정상회담이나 미북정상회담이 잘한 회담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와 미국은 정치상황상 실패를 너무 두려워한 탓이다. 이를 북한이 읽고 이용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간 후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 내용이 ‘남조선 정상이 오고 가니까, 정치적 각성이 무뎌지고 긴장이 해이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백번 웃으며 악수하다가도 언젠가 한번은 뒷덜미를 물어뜯어서라도 통일의 위업을 수행해야 한다. 총대에 의해서만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김정은 특별지시가 내려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김정은 다르다’느니 ‘김정은은 변했다’느니 하는 한마디로 해명될 문제가 아니다.

서상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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