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라는 말 참 이상한 말입디다. 글쎄 부랑무식한 제가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큰 집 조카들을 데리고 벌초를 하는데, 이 벌초라는 말이 자꾸만 벌받는 초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 원 참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무던히 속을 썩여드리긴 했지만… 조카들이 신식 예초기를 가져왔지만 저는 끝까지 낫으로 벌초를 했어요, 낫으로 해야 부모님하고 좀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고, 뭐 살아 계실 적에는 서로 나누지 않던 얘기도 주고받게 되고, 허리도 더 잘 굽혀지고… 앞으로 산소가 없어지면 벌받을 곳도 없어질 것 같네요, 벌받는 초입이 없어지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어요, 안 그래요, 형님

- 시집 『터미널』(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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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묘를 방치해 두면 자손 된 도리와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벌초가 행해져 왔다. 이를 한 해만 걸러도 잡풀이 무성하여 볼썽사납고 봉분을 인식 못 할 때가 있다. 지금의 우리 대에는 ‘벌받는 초입’처럼 해오던 대로 이를 행한다 해도, 장차에는 어찌 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2천여 만기의 묘 가운데 무연고가 절반쯤 된다고 한다. 현행 법령은 개인이건 공동이건 묘지 사용을 최장 60년으로 제한하고 있고, 화장의 보편화 추세를 감안하면 머잖아 벌초 문화는 사라질 것이다.
벌초가 없는데 성묘가 지속될 리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가 대자연의 품에 안긴다는 섭리를 뒤늦게 인식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성가시기 때문이다. 조상의 묘를 찾을 때면 죽음은 만인을 평등하게 하고 만물을 소통케 하는 절차임을 새삼 깨닫는다. 비로소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온전히 자연의 일부가 됨을 확인한다. 지난 추석 무렵 마음의 평안을 위해 벌초를 다녀왔지만 사실상 육촌들이 예초기를 돌려 해놓은 상태에서 삐죽 올라온 풀을 손으로 몇 개 뽑는 게 다였다. 그래도 살짝 면피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그렇다고 조상께 후손들 잘 보살펴달라고 빌지는 않았다. 그 옛날, 지맥이 좋은 곳에 조상 묘를 쓰면 자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온다는 속설에 따라 너도나도 명당자리를 탐했다는데, 내 조상 산소들이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내세울 만한 큰 인물이 없는 걸 보면 지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자기 조상 묘를 남의 명당 산소를 파헤쳐 투장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조상의 묘소를 가끔 살피러 가면서부터 성묘 문화가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상 묘를 살피러 갔다가 산소의 풀을 베기 시작한 게 벌초의 기원이다.
그게 또 함부로 남의 묘 넘보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그런 벌초가 지금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기계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옛날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어디 감히 조상님의 묘에 불경한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성의없이 기계를 들이댄단 말인가. 점차 벌초에 참석하는 사람도 줄고 먼 곳에 있으면 대행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무리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기복의 의미가 있다 한들 성가신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좋은 것은 있다. 모처럼 아들과 고기를 구워 반주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삶이 내 한 몸의 태어남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느꼈다.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이 아니어도 그것으로 복 하나는 건지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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