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고향을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五代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後苑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중략) /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며 어찌 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 시집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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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0월 추석 즈음하여 발표한 시다. 심훈은 이듬해 1933년 ‘그날이 오면’ 출간이 일제의 검열로 좌절되자 그리워도 가지 않겠다던 그 고향 당진으로 낙향한다. 파헤친 뒷동산에 왜놈 주택이 들어섰고, 조상 모시던 사당 자리에는 왜놈 귀신 모시는 신사가 들어선 기막힌 꼴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5대를 내려오며 오순도순 살았던 고향 땅에 왜놈들이 난장판을 쳤으니 속이 뒤집히기도 했을 것이다.
‘빈 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고’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가슴에 안는 ‘그날이 오면’ 찾겠다던 심훈은 그날을 보지 못한 채 1936년 9월 16일 36세로 급서하고 말았다. 그의 소설 ‘상록수’를 직접 각색ㆍ감독해 영화로 만들려던 꿈과 함께 그의 고향 땅 상록의 꿈도 묻혀버렸다. 1949년 발간된 ‘그날이 오면’은 그의 유고시집이다. 심훈은 이상과 함께 시, 소설 두 장르의 대표작 모두 교과서에 실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애를 끓이다가 울병이 생겨 세상을 서둘러 떠나간 이가 어찌 심훈만이랴.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북한 체제의 변화에 대한 기대로 노심초사하며 지낸 세월이 얼마이던가. 살아생전 통일이 와서 고향땅을 밟아볼 수 있으려나 꿈만 꾸다 무정하게 세월은 가고, 그렇게 사람도 가고 그리움마저 화석이 되어 버린 사무친 시대를 살아왔다. 평양이 고향인 이모부는 혈혈단신 월남한 분이지만 생전 이산가족 상봉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심훈이 고향에 가지 않겠다는 이유와 비슷했다.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에 희망이 자꾸만 뒷걸음질칠 때 “이제 글렀다”며 3년 전 아주 눈을 감으셨다. 김동길 박사와 평양고보 동창이며 월남하여 육군 장교로 복무하신 분이라 보수 성향이 뚜렷했지만 통일의 염원은 간절했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남북 화해와 통일에 대한 기대를 누구보다 반기고 꿈에 부풀었으리라. 보수 진보 불문하고 통일의 열망을 가진 정부야말로 마땅하고 정당한 정권이라 했다. 비록 심훈과 내 이모부와 수많은 실향민은 퇴색된 꿈을 안고 먼저 떠났지만, 긴 세월 견뎌온 분들에게는 차오르는 달빛 아래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는 고향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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