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 시집 『새』 (조광출판사,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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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생인 시인이 불혹에 즈음한 1969년에 쓴 시다. 이 시가 수록된 ‘새’는 살아있는 시인의 시집이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첫 사례였다. 여기에는 물론 기막힌 곡절이 있지만 그보다도 문단 데뷔 당시의 일화가 흥미롭다. 서울상대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1954년 어느 날, 그는 학장으로부터 “상과대학 석차 5위 안의 학생은 한국은행에 공짜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이 5번 안의 성적임을 암시받은 것이다. 그러나 천상병은 1952년에 이미 추천 완료되었고 당시 문예지에도 시를 발표하고 있었으므로 안정된 직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오로지 시인으로만 살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훗날에도 시인 이상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결심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후회는 없다고 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도 이유의 하나겠으나 일찌감치 이런 특별한 결단과 그의 시, 삶의 방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천진무구한 순수시인, 기인으로 기억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천승세는 일찍이 기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인은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들은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다. 매우 진실하게 평범하고 자유로운 인간들이다.”
천상병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다. 그에게 당시 왁자지껄했을 추석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겠으나 쓸쓸하긴 했나 보다. 그러나 그것이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임을 스스로 잘 안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에서의 제사는 따분한 인습이나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형식의 예복을 벗어던지고, 인간을 정해진 틀에 끼워 넣으려는 획일적 사회구조에 등을 돌린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제의였으리라. 소설가 김훈은 그의 기행을 “이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열어버리는 놀라운 개방성”이라고 표현했다. 상대를 나온 그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과 조소로 일관한 삶을 산 것도 일반의 눈으로 보면 아이러니하다.
그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가난도 행복의 일부분이라 여기면서 가난을 즐겼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자유와 무욕의 삶은 이윽고 추석날 ‘노자’의 말씀을 되새기기에 이른다.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는 시종 자유로운 삶을 살아왔지만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며 자조한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은 화의 근원임을 깨닫는다. 조용하면서 은근히 다른 존재들과 동화하는 ‘현동(玄同)’의 삶을 살아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는 물질의 가난뿐 아니라 말의 가난을 삶의 전략으로 채택하기로 마음먹는다. 49년 전 추석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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