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중략)/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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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은 충청지역의 중앙에 위치하여 각 지역과 국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다. 조치원이란 지명은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조선 초기 역원제도에서 비롯하였다. 주요 도로를 따라서 숙박과 교통기능 중심으로 형성된 취락을 말하며, ‘원’에서는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 전달, 지방 파견, 출장 등을 위해 길 떠난 관리와 상인들에게 주로 숙식을 제공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원은 거의 폐지되었고 사리원, 장호원, 이태원 같은 몇몇 지명만 그 흔적으로 남았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이래로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른 군사적인 목적과 지방통치를 위한 행정적인 요구로 다양한 형태의 지도들이 제작되었고, 제작기술 또한 크게 발전하였다. 대항해시대 때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지도제작 붐이 제작기술과 함께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도 전해졌던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김정호는 꼼꼼한 실사와 정밀한 검증을 거쳐 철종 때인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게 된다.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씩 22층으로 나누고, 층별 동서 80리 간격의 총 22첩으로 구성된 목판본 지도이다. 이를 펼치면 세로 6.7m 가로 3.8m 크기의 초대형 전국지도가 된다. 다양한 인문지리 정보와 함께 1만1천500개의 지명이 수록된 이 지도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체 지도라 하겠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선물로 준비해간 대동여지도는 그 영인본이다. 이어진 길을 따라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 교류 협력을 증진하고, 번영과 평화를 이루자는 의미를 담아 휴전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완전체 지도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선물했다. 문 대통령은 고산자가 그랬듯이 산 넘고 물 건너 백두에서 한라까지 험한 길 마다치 않고 부르튼 발로 지도를 완성해내고 싶은 것이다. 가다가 정 힘들면 조치원 같은 ‘원’에서 잠시 쉬어는 갈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고산자는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이 다를지 몰라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지도 속 세상은 살아서 다르지 않으며 달라져서도 안 된다. 어제 남북 정상 간의 합의 내용으로 미뤄보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우리 국토의 동맥 속으로 흐르는 민족의 뜨거운 피를 다시금 느낀다. 12년 전 금강산 말고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들이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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