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문제에서 발생하는 변수들우리 모두 차분하게 힘·지혜 모아슬기롭게 해결하는 대응책 마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최고 번성기를 연 황제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글로벌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에 걸맞은 지배 구조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구상을 착실하게 구현하여 200여 년에 걸친 번영기, 즉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를 열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내가 본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후계 구도는 예수에서 베드로,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 간 것이다. 역사에서는 성격상 상반되는 인물이 전임자의 혁명을 완수한 경우가 많다”라고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 사후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자신의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의 좌우명 ‘페스티나 렌테’는 수많은 후세대 정치인과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로마제국 아홉 번째 황제인 페스파시아누스는 권력의 최상부에 오르기 어려운 세리 집안 출신이지만 특유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초상이 그려진 동전 뒤쪽에는 ‘닻과 돌고래’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을 로고로 새긴 것이다. 무거운 ‘닻’은 배의 ‘안전’을 의미하고 ‘돌고래’는 파도를 헤치고 빠르게 나아가는 ‘속도’를 상징한다.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들도 ‘닻과 돌고래’ 아이콘을 애호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출판업자 알도 미누치오도 ‘페스티나 렌테’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포함하여 수많은 고전 텍스트를 출판하면서 인문 정신의 고양과 인문학 부흥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가 만든 알도 출판사의 표장은 돌고래가 닻을 휘감고 있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닻과 돌고래는 안정되게 일정 속도를 유지하며 기회를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돌고래처럼 민첩하게 행동하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꽃이 아닌 그가 출판한 책들이 그의 유해 주변을 장식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너무 들떠 있고, 모든 일에서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고 성과를 얻고 싶어 한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안정과 속도 어느 한 쪽이 비정상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되는 측면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곳곳에서 막상 속도가 필요한 곳에서는 속도가 없고, 안정과 무게가 요구되는 곳에는 또 지나치게 빨리 결론을 내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경제 발전과 혁신을 위해 시급하게 필요한 구시대적인 악습과 규제는 속도감 있게 철폐되지 않고 있다. 반면에 부동산 문제 등은 너무 성급하고 방향성이 없다. 그냥 불쑥 대책이라고 발표해놓고 그 다음 날 일부 내용을 수정한다. 지금 부동산 정책은 일관된 방향 없이 여론의 향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양새다.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2022 대입 개편안’도 졸속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개편이 아니라 개악을 해 놓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최고의 제도를 만들기 위해 토론과 논쟁의 단계에서는 급진적인 방법까지 다 나와야 한다. 그러나 최종 단계에서는 수험생과 학부모, 국가의 장래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했다. 교육 당국은 닻도 돛대도 없는 배를 이끌고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최악의 난파 상태를 맞은 것이다.
지금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도 남북한과 미국 등 이해 당사국 사이에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럴수록 다른 한편에서는 아우구스투스나 알도 미누치오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페스티나 렌테’의 지혜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닻과 돌고래’, 다시 말해 ‘무게가 느껴지는 안정감과 신속한 속도감’의 상호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안정감을 주는 닻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바람과 물의 흐름, 예측할 수 없는 돌발 변수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대응책 마련을 위해 우리 모두가 차분하게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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