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작가 기시미 이치로 가 쓴 ‘미움 받을 용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살아간다. 변한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그 결과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반면 변화는 많은 위험이 따르기에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비교적 안전한 현재를 파괴하지 않는다.
지병인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지하철을 타려고 공원을 지나갔다. 공원은 지하철로 가는 빠른 길이다. 공원은 사람은 드물게 보이지만 나무와 숲이 울창하였다. 푸른 대구를 자랑하는 역을 톡톡히 하는 곳이다. 공원에는 노인 몇몇이 긴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무 그늘에서는 청소년 둘이서 서성이고 있었다. 멀리서는 여성 미화원이 잔디밭을 매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한낮의 공원은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고요가 더욱 축적되고 있었다.
나에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연인 둘이 오고 있었다. 둘이는 덥지도 않은지 걸음을 똑바로 걷지 못할 정도로 붙어 있었다. ‘참 좋구나, 젊음은 더위도 이기는구나, 나의 청춘도 그랬던가?’ 지금 저들처럼 뜨거운 시간을 가지지 못함에 대한 후회가 그들을 계속 응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가까이 오는 그들의 모습에 이상한 점이 보였다. 멀리서는 몰랐으나 그들의 데이트는 비정상적이었다. 여성은 남자가 이끄는 대로 가지 않고 걸음을 버티려 하고 있었고, 남자는 억지로 여성을 끌고 가고 있었다. 남자의 한쪽 팔이 여성의 허리를 감고, 나머지 팔로 여성을 꼼짝 못하게 부둥켜안고 있었다.
여성은 키가 큰 미인으로, 늘씬하고 매력적이었으며, 남자는 검은 피부의 얼굴에 근육질이었다. 여성은 나를 보자 내가 들으라는 듯 “아아 -악”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당황한 남자가 잠시 경계를 늦추는 사이 여성은 남자의 품에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것은 뻔한 결과였다. 몇 발 못 가서 남자에게 잡혔다. 붙잡힌 여성은 또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와 냅다 달리고, 남자는 뛰어가 붙잡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하였다. 여성은 남자에 게 붙들릴 때마다 “아아 -악”하고 고함을 쳤다. 그 고함은 나를 향한 구원의 소리였다. ‘나를 좀 구해 주세요. 못 본 척하지 말고 제발 도와주세요.’ 여성의 애원은 공원의 고요를 깨뜨리고 나뭇가지를 지나 나의 고막을 때렸지만 나는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아무 관계 없는 남의 사생활에 끼어들었다가 봉변을 당하는 일을 수차례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힘차게 걸음을 재촉하였다. 몇 걸음 못 가서 여성의 외마디 소리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여성은 남자에게 끌려가면서 고개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공원의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노인들이나 청소년이나 미화원 모두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무심한 사람들 여자가 끌려가는데….’ 욕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욕은 내가 나에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 남자를 호통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검은 얼굴과 근육질의 몸매가 가로막았다.
체격도 왜소하고, 힘도 없고, 무술 실력도 없는, 이도 저도 아닌 내가 “이봐 젊은이 여자가 싫어하잖아 붙잡은 손 좀 놓지?”하고 소리친들, “야, 이놈아 강제로 연약한 여자에게 무슨 짓이냐!” 고함을 지른들,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공연히 참견해봤자 “꼰대, 노망” “영감탱이, 네 나이 네가 먹었지 웬 참견이야, 맛 좀 바야 알겠나.” 남자의 성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냥 모른 체하는 것이 정답인 듯했다. 당당하지 못하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도로에 거의 다 와서 뒤돌아보니 아직도 여성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남자는 놓지 않으려 했다. 내가 돌아보니 여성은 “아아 -악”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얼른 도로로 나와 네거리에 오니 경찰 순찰차가 있었다. 경찰에게 공원 쪽으로 빨리 가보라고 하였다. 경찰이 달려갔다.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비겁자들은 ‘현 사회는, 용기는 불안을 가져올 수 있게 한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대로 사는 것이 한층 더 편안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몸은 편안함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러나 사회는 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고, 개인은 자신과의 다툼에서 용기를 가져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동환

객원논설위원

전 경산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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